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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석 칼럼] 전쟁과 광기의 시대에 유엔기념공원에서 평화의 소중함을...
2026. 03. 29. 오후 11:42
69우크라이나 전쟁, 이란 전쟁 등 전지구적 위기 맞아 전쟁 없는 시대 갈망 커
한국전쟁 유엔군 전사자 4만896명 중 2336명이 잠들어 있는 유엔기념공원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전쟁에 뛰어든 젊은이들의 안타까운 죽음들
"우리의 가슴에, 조국에 님들을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새긴다"는 명비 뭉클
“우리의 가슴에 님들의 이름을 사랑으로 새깁니다. 우리의 조국에 님들의 이름을 감사로 새깁니다. - 한국전 참전 유엔군 전몰용사를 영구히 추모하며
We engrave your names in our hearts with love. We inscribe your names in our land with appreciation. - In Eternal Remembrance of the Fallen of UN Forces in Korean War)
세계 유일의 유엔기념공원묘지(United Nations Memorial Cemetery in Korea, UNMCK).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에 이어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으로 수많은 생명이 스러져 가는 전지구적 위기의 시대에 유엔기념공원묘지는 전쟁과 평화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인류 역사상 참혹한 전쟁 중 하나로 꼽히는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전몰용사들은 이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유엔군 소속 전사자들이 잠들어 있는 유엔기념공원 묘역. 모두 2336명의 전몰 용사가 영면하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송문석).
부산시 남구 유엔평화로 93. 한국전쟁에서 사망한 유엔군 전사자의 유해가 영면하고 있는 곳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숨진 유엔군 전사자(실종자 포함)는 모두 4만896명. 미국이 3만6492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영국 1177명, 터키 1005명, 캐나다 516명으로 뒤를 잇는다. 이밖에 호주(346명) 벨기에(106명) 콜롬비아(213명) 에티오피아(122명) 프랑스(270명) 그리스(186명) 룩셈부르크(2명) 네덜란드(124명) 노르웨이(3명) 필리핀(120명) 남아공(37명) 태국(136명) 등이 자국군을 파견했다가 젊은이들을 이곳에서 잃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당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돼 극도의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빈곤으로 허덕이던 나라였다. 국제적으로는 거의 존재감이 없던 나라였다.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어디에 있고 어떤 나라인지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이름도 잘 모르는 그런 나라의 전쟁터에 전 세계에서 16개국이 전투지원을, 6개국은 의료지원에 동참하면서 자국의 젊은이들을 파견했다.
유엔기념공원 상징구역에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22개국과 대한민국 국기, 유엔기가 연중 게양되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송문석).
그렇게 세계 각지에서 달려온 그들은 자신들과 하등 관계없는 먼나라의 동족 간에 벌어진 전장터의 골짜기 또는 강가에서 하나둘 스러져갔다. 현재 유엔기념공원에는 모두 14개국 2336명의 전몰용사의 유해가 잠들어 있다. 영국이 892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튀르키예 462명, 캐나다 382명, 호주 281명, 네덜란드 124명 순이다. 이밖에 프랑스(47명) 미국(41명) 대한민국(39명, 한-유엔 연합의 상징적 인물들) 뉴질랜드(32명) 남아프리카공화국(11명) 콜롬비아(4명) 태국(3명) 노르웨이(1명) 벨기에(1명) 기타(16명)이다.
미국은 전사자가 3만6492명으로 가장 많은데도 유엔기념공원에 묻힌 용사는 41명에 불과하다. 이는 ”전사자를 적지에 남겨두지 않는다“는 미군의 원칙이 이곳에도 적용된 것이 아닐까.
한국전쟁에서 숨진 전몰용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누구의 아들이었고 오빠였으며 사랑하는 사람을 고국에 남겨두고 온 청년이고 남편이었다. 이곳 유엔기념공원에 잠든 이들 역시 모두가 안타까운 사연들을 가슴 속에 안고 묻혀 있을 것이다.
유엔 참전군 장군으로서는 유일하게 이곳에 묻혀 있는 유일한 군인. 미국 육군의 리처드 위트컴(1894~982) 준장도 그런 사람이다. 미국 캔자스 주에서 태어난 위트컴 장군은 학군사관(ROTC) 출신으로 소위로 임관한 이듬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을 지휘했다. 한국과는 6.25 전쟁 말기인 1953년 부산에 있던 미국 제2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하며 인연을 맺는다.
1953년 7월 27일 3년간의 한국전쟁이 끝나고 숨을 돌릴 즈음인 11월 27일 부산 중구의 한 판자촌에서 큰 불이 났다. 주택 3132채가 불타고 3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대화재였다. 위트컴 장군은 상부의 승인 없이 미군 군수기지사령부 내 창고에 있던 식량과 의복을 이재민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줬다. 미국 내에서 ‘군수물자 전용 논란’이 벌어졌다.
미 의회에서 청문회가 열리고 본국으로 소환된 위트컴 장군은 의원들 앞에 섰다.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3만 여 이재민과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입니다. 우리 병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떠는 사람들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미 의회와 의원들은 더는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위트컴 장군은 부산에 의료시설이 부족하다는 걸 안타깝게 여겨 미군 장병 월급을 1%씩 모으는 운동을 벌였다. 본인도 한복을 입고 갓을 쓴 채 거리로 나서 모금활동을 벌였다. 미 언론은 그를 ‘한국의 양반(Gentleman of Korea)’이라고 불렀다. 그의 노력으로 메리놀병원 등 대형 병원이 부산에 설립됐다. 그는 1954년 군복을 벗은 이후에도 한국에 남아 전후 재건 지원과 미군 유해 발굴 송환에 앞장섰다. 위트컴 장군은 생전에 “내가 죽으면 한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국 전쟁 고아의 아버지’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사람’은 그렇게 유엔기념공원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다.
형제는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작은 마을 이그나스에서 태어났다. 형 조지프 허시(Joseph Hearsey)는 7남매 중 장남이었고, 아치볼드(Archibald)는 한 살 터울의 차남이었다. 동생 아치볼드가 먼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형인 조지프는 홀로 참혹한 전쟁터에 뛰어든 동생이 걱정돼 뒤따라 지원했다. 형은 동생이 있는 프린세스 패트리셔 경보병연대에 배치됐다. 그러나 형제는 같은 연대에 있었지만 계속되는 전투 속에서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1951년 10월 13일 동생 아치볼드는 “너와 이름이 같은 병사가 쓰러져 있다”는 전우의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캐다나에 있을 줄 알았던 형 조지프가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고 피투성이로 고꾸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치볼드는 그때에서야 형이 자신을 보호하려고 참전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형은 1951년 10월 부산 UN기념공원에 안장됐다. 동생은 전쟁이 끝나자 형의 유일한 유품인 파란색 실크 파자마를 들고 고향으로 돌아와 1955년 명예 제대를 했다. 동생은 평생 형을 그리워하며 상처를 가슴에 묻고 살았다. 시간이 흘러도 전쟁이 할퀸 가슴 속 상처는 지워지지 않았다. 폐질환으로 25년간 투병생활을 한 그는 부산에 잠든 형과 합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2012년 2월 25일 봄비가 흩뿌리던 UN기념공원에서 캐나다 판 ‘태극기 휘날리며’의 주인공 형제가 60년 만에 합장돼 영면에 들어갔다. 외동딸 데비(Debbi) 씨의 품에 안긴 아치볼드의 유골함이 형 조지프의 곁에 돌아와 누웠다. 흑백 영정 사진 속 아치볼드는 청년의 모습은 사라지고 백인 노인의 모습으로 형 조지프와 합장됐다.
유엔기념공원 주 묘역 바로 아래에는 약 100m 길이의 수로(水路)가 있다. 죽은 이들이 잠들어 있는 공간(묘역)과 삶의 공간(녹지)을 나누면서도 하나로 잇는 물길이다. ‘도은트 수로(Daunt Waterway)’다.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전사자 중 최연소자(17세)인 호주 병사 도은트(J P DAUNT)의 성을 따서 만든 수로다. 못다 핀 젊음을 기리기 위해 생명의 수로를 만든 것이다.
60년 만의 형제 합장에 못지않은 부부의 애틋한 이별과 죽음, 그리고 사후 만남의 사연도 유엔기념공원은 품고 있다. 70여 년 만에 죽어서야 그리던 남편 찰스 그린(Charlie Green) 중령을 만난 올윈 그린(Olwyn Green) 여사.
찰스 그린은 1919년 호주 그래프턴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민병대에 입대해 세계 2차대전에 참전하는 등 탁월한 지도력을 인정받아 중령으로 승진한다. 그린 중령은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해 9월 28일 부산항에 입항해 연천전투, 박천전투에서 승리를 하는 등 북진하다 달천강 근처에서 북한군의 포탄 파편이 복부를 관통해 11월 1일 전사하고 만다.
17살에 찰리를 만나 사랑에 빠진 올윈과 1943년 1월 결혼하고 7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그린 중령은 30살, 올윈은 26살, 둘 사이에서 낳은 딸은 3살이었다. 올윈 여사는 평생 남편 그린 중령을 그리며 살아갔다. 그녀는 ‘그대 이름은 아직도 찰리(The Name’s Still Charlie)’라는 제목으로 그린 중령의 남은 이야기를 자서전 형식으로 발간하기도 했다.
2019년 11월 9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 올윈 여사는 젊은 시절 생이별한 남편을 평생 잊지 못하면서 “남편의 묘역에 합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2023년 9월 21일 올윈 그린 여사의 100번째 생일에 그녀는 딸 안시아 부부와 손자 부부, 증손자 등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남편의 곁에 묻혔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용사들이 고국에서 숨을 거둔 후 유엔기념공원에 전우들과 함께 묻히기를 희망하는 경우 안장을 지원하는 ‘사후 안장(Posthumous Internment)’도 자주 개최된다. 2015년부터 현재까지 총 32명의 용사가 제2의 고향 부산에서 잠들고 있다.
유엔군 전몰장병을 영구히 추모하기 위해 2006년 건립된 유엔군 전몰장병 추모명비(사진: 취재기자 송문석).
유엔기념공원 중간 쯤에는 유엔군 전몰장병 추모명비가 있다. 우주를 상징하는 원형 수반에 전몰 영혼들이 머무는 하늘과 전사자 이름, 그리고 참배하는 이들의 모습이 함께 비친다. 수반 안에는 전쟁을 상징하는 철모가 평화로운 연꽃으로 승화하는 모습을 형상화돼 있다. 검은색 명비에 각국의 참전 전사자 4만896명(실종자 포함)이 이름이 알파벳 순서(국가별, 개인별)로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이렇게 많은 외국의 젊은이들이 이 땅에 와서 싸우다 목숨을 잃었나 싶어 먹먹해진다.
따뜻한 봄날 아이들의 손을 잡고 유엔기념공원을 산책하며 전쟁의 참혹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새겨봤으면 한다. 부산의 초중고 학생들의 현장학습 장소로도 추천한다. 한국인들보다 외국인들의 모습이 더 눈에 띈다. 홍매화가 붉다.
한국전쟁 유엔군 전사자 4만896명 중 2336명이 잠들어 있는 유엔기념공원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전쟁에 뛰어든 젊은이들의 안타까운 죽음들
"우리의 가슴에, 조국에 님들을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새긴다"는 명비 뭉클
“우리의 가슴에 님들의 이름을 사랑으로 새깁니다. 우리의 조국에 님들의 이름을 감사로 새깁니다. - 한국전 참전 유엔군 전몰용사를 영구히 추모하며
We engrave your names in our hearts with love. We inscribe your names in our land with appreciation. - In Eternal Remembrance of the Fallen of UN Forces in Korean War)
세계 유일의 유엔기념공원묘지(United Nations Memorial Cemetery in Korea, UNMCK).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에 이어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으로 수많은 생명이 스러져 가는 전지구적 위기의 시대에 유엔기념공원묘지는 전쟁과 평화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인류 역사상 참혹한 전쟁 중 하나로 꼽히는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전몰용사들은 이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유엔군 소속 전사자들이 잠들어 있는 유엔기념공원 묘역. 모두 2336명의 전몰 용사가 영면하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송문석).
부산시 남구 유엔평화로 93. 한국전쟁에서 사망한 유엔군 전사자의 유해가 영면하고 있는 곳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숨진 유엔군 전사자(실종자 포함)는 모두 4만896명. 미국이 3만6492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영국 1177명, 터키 1005명, 캐나다 516명으로 뒤를 잇는다. 이밖에 호주(346명) 벨기에(106명) 콜롬비아(213명) 에티오피아(122명) 프랑스(270명) 그리스(186명) 룩셈부르크(2명) 네덜란드(124명) 노르웨이(3명) 필리핀(120명) 남아공(37명) 태국(136명) 등이 자국군을 파견했다가 젊은이들을 이곳에서 잃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당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돼 극도의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빈곤으로 허덕이던 나라였다. 국제적으로는 거의 존재감이 없던 나라였다.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어디에 있고 어떤 나라인지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이름도 잘 모르는 그런 나라의 전쟁터에 전 세계에서 16개국이 전투지원을, 6개국은 의료지원에 동참하면서 자국의 젊은이들을 파견했다.
유엔기념공원 상징구역에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22개국과 대한민국 국기, 유엔기가 연중 게양되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송문석).
그렇게 세계 각지에서 달려온 그들은 자신들과 하등 관계없는 먼나라의 동족 간에 벌어진 전장터의 골짜기 또는 강가에서 하나둘 스러져갔다. 현재 유엔기념공원에는 모두 14개국 2336명의 전몰용사의 유해가 잠들어 있다. 영국이 892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튀르키예 462명, 캐나다 382명, 호주 281명, 네덜란드 124명 순이다. 이밖에 프랑스(47명) 미국(41명) 대한민국(39명, 한-유엔 연합의 상징적 인물들) 뉴질랜드(32명) 남아프리카공화국(11명) 콜롬비아(4명) 태국(3명) 노르웨이(1명) 벨기에(1명) 기타(16명)이다.
미국은 전사자가 3만6492명으로 가장 많은데도 유엔기념공원에 묻힌 용사는 41명에 불과하다. 이는 ”전사자를 적지에 남겨두지 않는다“는 미군의 원칙이 이곳에도 적용된 것이 아닐까.
한국전쟁에서 숨진 전몰용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누구의 아들이었고 오빠였으며 사랑하는 사람을 고국에 남겨두고 온 청년이고 남편이었다. 이곳 유엔기념공원에 잠든 이들 역시 모두가 안타까운 사연들을 가슴 속에 안고 묻혀 있을 것이다.
유엔 참전군 장군으로서는 유일하게 이곳에 묻혀 있는 유일한 군인. 미국 육군의 리처드 위트컴(1894~982) 준장도 그런 사람이다. 미국 캔자스 주에서 태어난 위트컴 장군은 학군사관(ROTC) 출신으로 소위로 임관한 이듬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을 지휘했다. 한국과는 6.25 전쟁 말기인 1953년 부산에 있던 미국 제2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하며 인연을 맺는다.
1953년 7월 27일 3년간의 한국전쟁이 끝나고 숨을 돌릴 즈음인 11월 27일 부산 중구의 한 판자촌에서 큰 불이 났다. 주택 3132채가 불타고 3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대화재였다. 위트컴 장군은 상부의 승인 없이 미군 군수기지사령부 내 창고에 있던 식량과 의복을 이재민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줬다. 미국 내에서 ‘군수물자 전용 논란’이 벌어졌다.
미 의회에서 청문회가 열리고 본국으로 소환된 위트컴 장군은 의원들 앞에 섰다.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3만 여 이재민과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입니다. 우리 병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떠는 사람들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미 의회와 의원들은 더는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위트컴 장군은 부산에 의료시설이 부족하다는 걸 안타깝게 여겨 미군 장병 월급을 1%씩 모으는 운동을 벌였다. 본인도 한복을 입고 갓을 쓴 채 거리로 나서 모금활동을 벌였다. 미 언론은 그를 ‘한국의 양반(Gentleman of Korea)’이라고 불렀다. 그의 노력으로 메리놀병원 등 대형 병원이 부산에 설립됐다. 그는 1954년 군복을 벗은 이후에도 한국에 남아 전후 재건 지원과 미군 유해 발굴 송환에 앞장섰다. 위트컴 장군은 생전에 “내가 죽으면 한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국 전쟁 고아의 아버지’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사람’은 그렇게 유엔기념공원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다.
형제는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작은 마을 이그나스에서 태어났다. 형 조지프 허시(Joseph Hearsey)는 7남매 중 장남이었고, 아치볼드(Archibald)는 한 살 터울의 차남이었다. 동생 아치볼드가 먼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형인 조지프는 홀로 참혹한 전쟁터에 뛰어든 동생이 걱정돼 뒤따라 지원했다. 형은 동생이 있는 프린세스 패트리셔 경보병연대에 배치됐다. 그러나 형제는 같은 연대에 있었지만 계속되는 전투 속에서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1951년 10월 13일 동생 아치볼드는 “너와 이름이 같은 병사가 쓰러져 있다”는 전우의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캐다나에 있을 줄 알았던 형 조지프가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고 피투성이로 고꾸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치볼드는 그때에서야 형이 자신을 보호하려고 참전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형은 1951년 10월 부산 UN기념공원에 안장됐다. 동생은 전쟁이 끝나자 형의 유일한 유품인 파란색 실크 파자마를 들고 고향으로 돌아와 1955년 명예 제대를 했다. 동생은 평생 형을 그리워하며 상처를 가슴에 묻고 살았다. 시간이 흘러도 전쟁이 할퀸 가슴 속 상처는 지워지지 않았다. 폐질환으로 25년간 투병생활을 한 그는 부산에 잠든 형과 합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2012년 2월 25일 봄비가 흩뿌리던 UN기념공원에서 캐나다 판 ‘태극기 휘날리며’의 주인공 형제가 60년 만에 합장돼 영면에 들어갔다. 외동딸 데비(Debbi) 씨의 품에 안긴 아치볼드의 유골함이 형 조지프의 곁에 돌아와 누웠다. 흑백 영정 사진 속 아치볼드는 청년의 모습은 사라지고 백인 노인의 모습으로 형 조지프와 합장됐다.
유엔기념공원 주 묘역 바로 아래에는 약 100m 길이의 수로(水路)가 있다. 죽은 이들이 잠들어 있는 공간(묘역)과 삶의 공간(녹지)을 나누면서도 하나로 잇는 물길이다. ‘도은트 수로(Daunt Waterway)’다.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전사자 중 최연소자(17세)인 호주 병사 도은트(J P DAUNT)의 성을 따서 만든 수로다. 못다 핀 젊음을 기리기 위해 생명의 수로를 만든 것이다.
60년 만의 형제 합장에 못지않은 부부의 애틋한 이별과 죽음, 그리고 사후 만남의 사연도 유엔기념공원은 품고 있다. 70여 년 만에 죽어서야 그리던 남편 찰스 그린(Charlie Green) 중령을 만난 올윈 그린(Olwyn Green) 여사.
찰스 그린은 1919년 호주 그래프턴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민병대에 입대해 세계 2차대전에 참전하는 등 탁월한 지도력을 인정받아 중령으로 승진한다. 그린 중령은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해 9월 28일 부산항에 입항해 연천전투, 박천전투에서 승리를 하는 등 북진하다 달천강 근처에서 북한군의 포탄 파편이 복부를 관통해 11월 1일 전사하고 만다.
17살에 찰리를 만나 사랑에 빠진 올윈과 1943년 1월 결혼하고 7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그린 중령은 30살, 올윈은 26살, 둘 사이에서 낳은 딸은 3살이었다. 올윈 여사는 평생 남편 그린 중령을 그리며 살아갔다. 그녀는 ‘그대 이름은 아직도 찰리(The Name’s Still Charlie)’라는 제목으로 그린 중령의 남은 이야기를 자서전 형식으로 발간하기도 했다.
2019년 11월 9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 올윈 여사는 젊은 시절 생이별한 남편을 평생 잊지 못하면서 “남편의 묘역에 합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2023년 9월 21일 올윈 그린 여사의 100번째 생일에 그녀는 딸 안시아 부부와 손자 부부, 증손자 등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남편의 곁에 묻혔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용사들이 고국에서 숨을 거둔 후 유엔기념공원에 전우들과 함께 묻히기를 희망하는 경우 안장을 지원하는 ‘사후 안장(Posthumous Internment)’도 자주 개최된다. 2015년부터 현재까지 총 32명의 용사가 제2의 고향 부산에서 잠들고 있다.
유엔군 전몰장병을 영구히 추모하기 위해 2006년 건립된 유엔군 전몰장병 추모명비(사진: 취재기자 송문석).
유엔기념공원 중간 쯤에는 유엔군 전몰장병 추모명비가 있다. 우주를 상징하는 원형 수반에 전몰 영혼들이 머무는 하늘과 전사자 이름, 그리고 참배하는 이들의 모습이 함께 비친다. 수반 안에는 전쟁을 상징하는 철모가 평화로운 연꽃으로 승화하는 모습을 형상화돼 있다. 검은색 명비에 각국의 참전 전사자 4만896명(실종자 포함)이 이름이 알파벳 순서(국가별, 개인별)로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이렇게 많은 외국의 젊은이들이 이 땅에 와서 싸우다 목숨을 잃었나 싶어 먹먹해진다.
따뜻한 봄날 아이들의 손을 잡고 유엔기념공원을 산책하며 전쟁의 참혹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새겨봤으면 한다. 부산의 초중고 학생들의 현장학습 장소로도 추천한다. 한국인들보다 외국인들의 모습이 더 눈에 띈다. 홍매화가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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