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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광장] 상하(常夏)의 나라엔 ‘나쁜 엄마’가 없다

2026. 04. 01. 오전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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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로 윌트벤처빌더(Wilt Venture Builder·싱가포르) 대표

얼마 전 싱가포르에서 한국인 여성 대표를 만났다. 네살짜리 아이를 한국에서 키우다 싱가포르로 건너온 워킹맘이다. 가장 크게 달라진 게 뭐냐고 묻자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죄책감이 줄었어요.” 한국에서는 어린이집 하원 때 엄마가 아닌 도우미가 아이를 데리러 오면 “저 집 애는 내놓은 애인가 봐”라는 시선이 따라붙었다고 한다. 직장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아이에게 못 해주는 것들에 매일 죄책감을 느꼈다고.

그런데 싱가포르에 오니 내가 꼭 다 안 해줘도 괜찮은 게 되레 당연했고, 그 분위기가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분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싱가포르라면 아이 둘, 셋도 낳겠어요.”

싱가포르 어린이집 등하원 시간에 가보면 풍경이 사뭇 다르다. 아이 손을 잡고 나타나는 사람은 대개 필리핀, 인도네시아, 미얀마 출신의 입주 도우미들이다. 이 도시국가엔 약 25만명의 외국인 가사도우미가 아침부터 밤까지 아이 돌봄과 집안일을 도맡는다. 월급과 수수료를 합해 한화로 100만원 이하 수준이다. 이곳에서는 이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 오히려 엄마가 직접 아이를 데리러 오면 “저 엄마는 왜 일을 안 하지?” 하는 시선이 돌아온다. 여성이 일하는 것이 기본값인 사회, 한국과는 확실히 다른 세계다.

한국으로 눈을 돌려 워킹맘들을 보면 존경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하다. 아니, 한국의 워킹맘은 신(神)이어야 한다. 직장에서는 아이 때문에 동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고, 어린이집 준비물은 하나하나 꼼꼼히 챙겨야 한다. 아이 봐주시는 분에겐 때마다 감사 인사도 잊지 말아야 한다. 남편과 아이들 건강한 밥상을 차리는 것도 엄마 지위에서 놓을 수 없다. 일도, 아이도, 남편도, 시댁도, 친정도 빠짐없이 챙기면서 직장까지 다녀야 비로소 ‘잘하는 엄마’로 인정받는다.

2024년 합계출산율 0.75. 대한민국은 OECD 38개국 중 부동의 꼴찌다. 워킹맘 고용률이 64.3%로 역대 최고를 찍었다고는 하지만, 그 이면에는 6세 이하 자녀를 둔 여성의 31.6%가 결국 직장을 떠나는 현실이 숨어 있다. 경력 단절 사유 1위는 육아로 44.3%다. 농경사회에서 자식은 노동력이자 노후 보장이었지만, 자식이 소비재가 된 시대에도 엄마에게만 과도한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는 가부장적 기대는 여전히 남아 있다. 소비되는 에너지가 너무 크다. 다 곱게 자란 사람들인데, 이 고생길을 누가 자처하겠는가?

정부도 해법을 모색했다. 필리핀 가사도우미 100명을 시범 도입했지만, 최저임금 논란과 문화적 거부감 속에 1년만에 사업을 접었다. 싱가포르에서 25만명이 자연스럽게 일하는 구조가, 한국에서는 100명도 뿌리내리지 못했다. 제도적 부족함 외에, 아이를 다른 사람 손에 맡기는 일을 ‘부모의 부족함’으로 여기는 우리 안의 인색한 시선도 발목을 잡았을 것이다.

싱가포르의 합계출산율도 0.97명으로 낮다. 도우미 제도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곳에서 만난 한국인 엄마들은 하나같이 “여기선 아이를 더 낳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 자신감의 원천은 정부 제도가 아니었다. “엄마가 다 안 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회의 분위기였다. 완벽을 강요하지 않는 분위기와 서로의 선택을 존중하는 시선 속에서만 가능한 자신감이다.

워킹맘들에게 ‘내려놓음’이란 단어는 참 낯설다. 무언가를 놓치면 뒤처질 것 같고, 잠시 쉬면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것 같아 끝내 손을 놓지 못한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아이 곁에서 끝없이 버티며 하루를 감내한다. 하지만 내려놓음은 포기가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한 용기 있는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한국이 진정 출산율을 끌어올리고 싶다면, 단순히 예산을 쏟아부어 부모의 지갑을 채워주는 일회성 처방에 앞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워킹맘의 어깨 위에 얹힌 신(神)의 무게를 내려주는 것이다. “괜찮아, 엄마가 다 안 해도 돼.” 이 한마디가 어쩌면 수조원의 저출산 예산보다 강력한 처방이 될 수 있다.

/원대로 윌트벤처빌더(Wilt Venture Builder·싱가포르) 대표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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