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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철의 나락 한 알]근데 이래도 정말 괜찮을까?
2026. 04. 05. 오후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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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집 근처 정릉시장 쪽으로 산책하러 갔다가 쓰레기 종량제 봉투가 떨어진 게 생각나 근처 마트에 들러 20ℓ짜리 한 묶음을 샀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한 아주머니가 내 손에 든 봉투를 보더니 놀란 표정으로 어디서 샀냐고 물었다, 근처 마트는 동이 났다며. 산 데를 알려주자 당장 산다며 부리나케 갔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침공에 맞서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제하자 글로벌 에너지 대란이 일어났다. 아시아만 해도 스리랑카, 파키스탄, 방글라데시가 연료 배급제와 휴교령을 시행했고 필리핀은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우리나라도 에너지 비상 상황으로 피해는 전방위적이다. 당장 농사철을 맞은 농촌은 부직포와 비닐 등 농자재를 구할 수 없어 발을 구른다.
요즘 뉴스에서 ‘에너지 절약’이라는 말을 종종 접하는데 처음에는 조금 생경했다. 언제부턴가 ‘절약’은 듣기 힘든 말이 됐고, 우리는 ‘소비’라는 말에 익숙해졌다. 한때는 절약이 일상이었고 무엇이든 아껴 쓰는 게 미덕이었다. 그런데 경제성장이 지상 과제가 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성장하려니 생산을 늘려야 했고, 생산이 늘어나니 소비를 늘려야 했다. 그렇게 절약이 아니라 소비가 미덕인 시대가 왔다.
이번 중동전쟁은 한동안 잊혔던 ‘절약’을 소환했다. 일본 교토의 한 목욕탕은 온수 절약 안내문까지 내걸었다. 우리나라가 원유와 천연가스가 나지 않는 나라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전량을 수입하면서도 우리는 돈만 주면 원유와 가스를 언제든 원하는 만큼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 전쟁이 그건 착각이라고 일러줬다. 자원이 지구에서 고갈되지 않았어도 팬데믹이나 전쟁 등으로 자원 수급에 큰 차질이나 실질적인 ‘고갈’이 생길 수 있다. 많은 나라가 코로나19로 얼마간 이런 일을 겪었고 요즘은 쿠바가 미국의 봉쇄 강화로 석유 기근을 겪고 있다.
이번 전쟁이 자원의 한계를 돌아보게 했지만, 사실 자원의 한계는 전쟁과 무관하다. 이 한계는 자연에 본디 있던 것으로 우리가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한계를 외면했고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한 물질적 성장은 불가능하다는 상식을 ‘지속 가능한 성장’이나 ‘녹색 성장’으로 비켜 갔다. 그러면서 한계가 없는 듯 생산과 소비를 늘려왔다. 여기에는 기술이 한계를 극복한다는 믿음도 한몫했다. 근데 이래도 괜찮을까?
‘호모 오일리쿠스’라는 신조어가 생길 만큼 이제 석유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게 됐다. 우리는 매일 석유를 먹고 바르고 입고 쓴다. 석유 매장량은 유한하고 석유 한 방울 나지 않아도 우리는 석유와 ‘헤어질 결심’은커녕 ‘줄일 결심’도 하지 않는다. 당장 석유화학산업에서 나오는 이윤도 크고 우리가 석유에 중독된 탓도 있겠다. 우리는 쓰레기봉투가 동날까 걱정은 해도 이참에 쓰레기를 줄이자는 얘기는 별로 하지 않는다. 일회용품을 비롯한 플라스틱 사용량은 줄어드는 게 아니라 늘어난다. 국제플라스틱협약에서 우리 정부는 플라스틱 생산 감축 주장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다. 근데 이래도 괜찮을까?
에른스트 슈마허는 ‘불교 경제학’을 제안하며 소박함과 비폭력이 비례한다고 했다. 자원이 유한한 세계에서 ‘적은 자원’으로 사는 사람들은 ‘많은 자원’에 의존하는 사람들보다, ‘자급자족인 지역공동체’에서 사는 사람들은 ‘국제무역’에 의존해서 사는 사람들보다 다툴 일이 적다는 것이다. 서로 더 많이 소유하고 소비하려 들면 갈등과 분쟁은 불가피하다. 미국의 이란 침공, 베네수엘라 습격과 그린란드 접수 야욕은 에너지와 광물 확보와 지배라는 미국의 기존 행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번 에너지 위기로 우리 삶의 토대가 얼마나 허약한지 훤히 드러났다. 허약한 체질을 바꾸려면 해외 에너지 의존부터 줄여야 한다. 그러려면 에너지 전환을 최대한 서두르되 전환은 재생에너지뿐 아니라 절약도 포함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성장지상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려면 절약을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창의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단순한 해외 에너지 의존 감축이 ‘이전과 같은 삶’을 지향한다면, 절약은 ‘이전과 다른 삶’을 지향한다.
유한한 물질세계에서 절약은 일상의 태도라야 마땅하다. 자원이 유한한 세계에서 절약은 궁핍이 아니라 자립과 공존의 의지다. 소비사회에서 절약은 소극적 체념이 아니라 적극적 저항과 전환의 의지다. 마음껏 소비하는 삶은 결국 자기 삶을 소비하고 약자의 삶을 배제한다. 진정한 풍요는 대량 생산과 소비가 아니라 소박한 삶으로 이루어진 호혜의 공동체에서 나온다. 에너지 위기를 맞아 어떻게든 이전과 같은 삶을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면 한편으론 이해가 가도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근데 이래도 정말 괜찮을까?” 지금 하기에는 너무 한가한 물음일까, 아니면 지금이야말로 꼭 해야 할 물음일까.
미국과 이스라엘의 침공에 맞서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제하자 글로벌 에너지 대란이 일어났다. 아시아만 해도 스리랑카, 파키스탄, 방글라데시가 연료 배급제와 휴교령을 시행했고 필리핀은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우리나라도 에너지 비상 상황으로 피해는 전방위적이다. 당장 농사철을 맞은 농촌은 부직포와 비닐 등 농자재를 구할 수 없어 발을 구른다.
요즘 뉴스에서 ‘에너지 절약’이라는 말을 종종 접하는데 처음에는 조금 생경했다. 언제부턴가 ‘절약’은 듣기 힘든 말이 됐고, 우리는 ‘소비’라는 말에 익숙해졌다. 한때는 절약이 일상이었고 무엇이든 아껴 쓰는 게 미덕이었다. 그런데 경제성장이 지상 과제가 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성장하려니 생산을 늘려야 했고, 생산이 늘어나니 소비를 늘려야 했다. 그렇게 절약이 아니라 소비가 미덕인 시대가 왔다.
이번 중동전쟁은 한동안 잊혔던 ‘절약’을 소환했다. 일본 교토의 한 목욕탕은 온수 절약 안내문까지 내걸었다. 우리나라가 원유와 천연가스가 나지 않는 나라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전량을 수입하면서도 우리는 돈만 주면 원유와 가스를 언제든 원하는 만큼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 전쟁이 그건 착각이라고 일러줬다. 자원이 지구에서 고갈되지 않았어도 팬데믹이나 전쟁 등으로 자원 수급에 큰 차질이나 실질적인 ‘고갈’이 생길 수 있다. 많은 나라가 코로나19로 얼마간 이런 일을 겪었고 요즘은 쿠바가 미국의 봉쇄 강화로 석유 기근을 겪고 있다.
이번 전쟁이 자원의 한계를 돌아보게 했지만, 사실 자원의 한계는 전쟁과 무관하다. 이 한계는 자연에 본디 있던 것으로 우리가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한계를 외면했고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한 물질적 성장은 불가능하다는 상식을 ‘지속 가능한 성장’이나 ‘녹색 성장’으로 비켜 갔다. 그러면서 한계가 없는 듯 생산과 소비를 늘려왔다. 여기에는 기술이 한계를 극복한다는 믿음도 한몫했다. 근데 이래도 괜찮을까?
‘호모 오일리쿠스’라는 신조어가 생길 만큼 이제 석유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게 됐다. 우리는 매일 석유를 먹고 바르고 입고 쓴다. 석유 매장량은 유한하고 석유 한 방울 나지 않아도 우리는 석유와 ‘헤어질 결심’은커녕 ‘줄일 결심’도 하지 않는다. 당장 석유화학산업에서 나오는 이윤도 크고 우리가 석유에 중독된 탓도 있겠다. 우리는 쓰레기봉투가 동날까 걱정은 해도 이참에 쓰레기를 줄이자는 얘기는 별로 하지 않는다. 일회용품을 비롯한 플라스틱 사용량은 줄어드는 게 아니라 늘어난다. 국제플라스틱협약에서 우리 정부는 플라스틱 생산 감축 주장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다. 근데 이래도 괜찮을까?
에른스트 슈마허는 ‘불교 경제학’을 제안하며 소박함과 비폭력이 비례한다고 했다. 자원이 유한한 세계에서 ‘적은 자원’으로 사는 사람들은 ‘많은 자원’에 의존하는 사람들보다, ‘자급자족인 지역공동체’에서 사는 사람들은 ‘국제무역’에 의존해서 사는 사람들보다 다툴 일이 적다는 것이다. 서로 더 많이 소유하고 소비하려 들면 갈등과 분쟁은 불가피하다. 미국의 이란 침공, 베네수엘라 습격과 그린란드 접수 야욕은 에너지와 광물 확보와 지배라는 미국의 기존 행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번 에너지 위기로 우리 삶의 토대가 얼마나 허약한지 훤히 드러났다. 허약한 체질을 바꾸려면 해외 에너지 의존부터 줄여야 한다. 그러려면 에너지 전환을 최대한 서두르되 전환은 재생에너지뿐 아니라 절약도 포함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성장지상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려면 절약을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창의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단순한 해외 에너지 의존 감축이 ‘이전과 같은 삶’을 지향한다면, 절약은 ‘이전과 다른 삶’을 지향한다.
유한한 물질세계에서 절약은 일상의 태도라야 마땅하다. 자원이 유한한 세계에서 절약은 궁핍이 아니라 자립과 공존의 의지다. 소비사회에서 절약은 소극적 체념이 아니라 적극적 저항과 전환의 의지다. 마음껏 소비하는 삶은 결국 자기 삶을 소비하고 약자의 삶을 배제한다. 진정한 풍요는 대량 생산과 소비가 아니라 소박한 삶으로 이루어진 호혜의 공동체에서 나온다. 에너지 위기를 맞아 어떻게든 이전과 같은 삶을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면 한편으론 이해가 가도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근데 이래도 정말 괜찮을까?” 지금 하기에는 너무 한가한 물음일까, 아니면 지금이야말로 꼭 해야 할 물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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