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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 싸졌지만 누군가는 피해, 바나나 대중화의 교훈

2026. 04. 11. 오전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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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환의 세상만사 경제학] 국제무역과 비교우위

기후 온난화에 따라 우리나라에서 바나나·망고 등 아열대 과일의 재배 면적이 증가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제주도 온실에서 난로 때며 기르던 바나나가 전남 신안에서도 재배가 된다니 격세지감이다.

한식을 맞아 성묘를 다녀왔다. 1991년에 돌아가신 할머니는 생전에 바나나를 좋아하셨기에 지금도 할머니의 제사상에는 바나나가 오른다. 80년대까지 한국에서 바나나는 맛있고 영양 많은 과일일뿐더러 값비싼 고급 과일이었다.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온대 기후인 한국에서 아열대 작물인 바나나를 기르려면 가장 남쪽 끝인 제주도에서조차 비닐하우스를 짓고 내부를 난로로 데워야 했다. 게다가 한국은 수출주도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개발도상국으로서, 바나나를 포함한 다수 품목의 수입을 제한하고 있었다. 이렇게 국내 생산비가 매우 높은 데다 강력한 수입 제한도 걸려 있으니 값이 비쌀 수밖에. 2015년 방영된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는 3인 가족이 바나나 한 개를 곱게 잘라 나눠 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당시 바나나 한 개 값은 2000원. 2025년 물가로 환산하면 바나나 한 송이에 대충 12만원쯤 된다. 명절이나 생일처럼 좋은 일 있을 때나 먹는 과일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1991년, 바나나 수입이 자유화된다. 아열대 국가에서 생산된 바나나를 관세만 물면 제한 없이 들여올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나나값이 즉각 뚝 떨어졌고, 요즘 바나나는 한 송이에 몇천원이면 살 수 있는 가장 흔한 과일이 되었다.

80년대 바나나 한 송이, 현재 물가로 12만원

전남 해남군 바나나 농장. 80년대까지 한국에서 바나나는 값비싼 고급 과일이었지만 수입 자유화로 흔한 과일이 되었다. 최근에는 기후변화로 국내 재배 면적이 증가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0년 무렵에 한국에서 경제학의 비교우위론을 공부할 때는 바나나만큼 좋은 사례가 없었다. 나라별로 각자 싸게 잘 만들 수 있는 상품을 만들어 서로 교환해서 쓰면 모두 이익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비교우위론이다. 필리핀 같은 곳에서는 아무 데서나 쉽게 자라는 바나나를 굳이 재배한다고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비닐하우스에 난로를 땐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우리는 우리가 잘 만드는 것에 집중하고, 자동차와 반도체 수출한 돈으로 값싼 바나나를 수입해서 먹으면 자원을 훨씬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지 않나. 바나나값이 눈앞에서 10분의 1로 떨어지는 것을 직접 본 한국 소비자들에게 이런 사실은 경제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쉽게 와 닿는 것이었다. 그런데 80년대에 바나나를 생산하던 농민이라면 입장이 다르다. 고수익 작물인 바나나를 택해서 열심히 생산하고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가격이 폭락하다니,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다. 대학 시절 듣던 강의에서 교수님 말씀이, 바나나 수입 개방에 관여한 공무원들은 제주도에선 바나나의 ‘ㅂ’자도 못 꺼낸다고.

무역 개방의 이익은 분명하다. 자원배분의 효율성 측면에서 그렇다. 무역을 개방한 모든 나라는 기존에 갖고 있던 자원을 가지고 더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만들 수 있게 되고, 그 이익은 모든 소비자에게 고르게 전달된다. 그런데 생산자는 입장이 다르다. 이건 효율성이 아니라 공평성의 영역이다.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 무역을 개방하면 비교우위가 있는 쪽은 수출 길이 열리면서 생산성이 더 높아지고 돈을 더 많이 벌게 되지만, 비교우위가 없는 쪽은 피해를 본다. 값싸고 품질 좋은 수입품 때문에 시장에서 경쟁이 치열해지고, 내가 만드는 물건의 가격이 깎이고, 심지어 폐업할 상황으로 몰리기도 한다. 실제로 90년대를 거치면서 제주도의 바나나 농가는 대부분 문을 닫았고 감귤이나 한라봉 등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무역정책을 담당하는 공무원이나 정치인, 경제학자에게는 이 부분이 가장 고민스럽다. 비교우위가 없는 생산자도 우리 국민이다. 교역의 이익은 누리면서, 산업 구조조정을 하여 비교열위 분야의 생산자들을 비교우위가 있는 쪽으로 이동시키거나, 이들이 망하더라도 먹여 살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첫 단계는 분야별 관세나 수입제한 조치를 이용해 부분적으로 국내시장을 보호하면서 시간을 버는 것이다. 관세는 소비자 관점에서 수입품의 가격이 더 비싸 보이게 만들어 국산품의 가격경쟁력을 높여준다.

중요한 것은 다음 단계다. 관세나 수입제한 조치로 벌어놓은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이 이 나라의 미래를 결정한다. 그냥 국내시장을 오래오래 계속 보호하면 되지 않냐고? 보호받는 산업 분야의 생산자는 기술혁신으로 생산성을 높일 필요를 못 느끼게 되고, 따라서 이 분야의 성장은 멈춘다. 20세기에 수입대체 공업화를 내세워 국내시장 보호에만 주력하던 중남미 국가들이 계속 중진국에 머물러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높은 관세나 수입제한 조치를 통해 국내의 높은 가격을 오래 유지하는 것은 국내 소비자들의 후생을 악화시킨다. 지금보다 10배, 20배 비싼 바나나를 과연 먹어야 할까. 우리 수출품을 사주는 다른 나라들이 우리의 수입제한 조치를 계속 눈감아 주느냐 하는 것도 큰 문제다.

따라서 개발도상국에서 지속적인 성장과 국민의 후생 증진을 도모하려면 “지금은 이 분야에서 국내시장을 보호한다. 하지만 5년 후에는 시장이 개방되고 선진국 업체와 같은 수준에서 경쟁해야 할 것이다”라는 식의 무역정책 및 산업정책이 필요하다. 그러면 자기가 일하는 분야의 비교우위가 곧 없어질 것이라고 예상하는 생산자들은 이에 대응하느라 바빠진다.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생산성 향상이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다. 뼈를 깎는 노력을 하여 선진국과 동등한 수준으로 경쟁할 수 있는 상품을 만들어낸다면 시장 개방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 대한민국의 성장 과정은 이런 이야기들로 넘쳐난다. 일본의 코끼리(조지루시) 밥솥과 TV의 수입이 자유화되고 할리우드 영화의 직배가 허용되었을 때 국내 전자산업이나 영화산업은 다 죽는다고 난리가 났었다. 하지만 현재 쿠쿠 밥솥이나 삼성·LG의 TV는 일본 제품의 수준을 한참 뛰어넘었고 K-무비와 K-드라마는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심지어 기후변화로 국내 바나나 재배도 다시 가능해졌다. 기업의 노력이나 환경의 변화로 기존에 없던 비교우위가 생길 수 있다는 얘기다.

비교우위, 잘 만드는 상품 교환해 쓰면 이익

1999년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반대 시위. 무역 자유화가 모든 생산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진 시애틀 시립 기록 보관소]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한국이 원유를 수출할 수는 없고, 그린란드가 바나나를 수출하게 될 것 같지도 않다. 이렇게 비교열위를 극복하기 어려운 분야의 생산자와 근로자는 국내시장을 보호하며 벌어놓은 시간 동안 비교우위가 있는 분야로 옮겨가야 한다. 근로자가 비교적 젊다면 재교육을 통해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최선의 시나리오다. 첨단과학기술, 정보통신기술, 수출용 고부가가치 작물 생산이나 양식업 등등. 하지만 중년의 근로자가 새로운 기술을 배워 다시 취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어렵다. 이럴 때는 기초생활을 보장하는 복지제도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20세기 한국에서는 주로 가족 내에서 자녀들이 부모를 부양하는 방식으로 복지 전달이 이루어졌다. 시골에서 농사짓던 아버지, 공장에서 바느질하던 어머니는 비교우위가 없어지면서 일을 그만두게 되지만, 그 자식들이 대학까지 공부해서 유망한 수출 분야에 취업한 다음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다. 시장 개방 전 제주도에서는 바나나 세 상자만 팔면 자식 대학 등록금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바나나 팔고 소 팔고 논밭 팔아 대학에 보낸 그 자녀들이 지금 자동차 엔진을 만들고 시스템 반도체를 설계하고 있다. 과거에는 이런 자녀들이 직접 자기 부모를 부양했고, 21세기 한국에서는 이들이 낸 세금과 건강보험료가 부모 세대에게 기초연금과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

성장하는 경제에서 산업구조의 선진화 과정은 이처럼 복잡하다. 수십 년에 걸쳐 근로자 하나하나의 인적자본이 비교우위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이다. 중요한 것은 개인과 기업이 최대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시장구조와 교육제도를 설계하고, 기초생활을 보장하는 사회안전망을 촘촘하게 까는 일이다.

이태환 세종대 경제학과 교수. 서울대와 스탠퍼드대에서 공부하고 삼성경제연구소에서 한국경제의 다양한 측면을 연구했다. 주변의 사회문화 현상을 경제학으로 해석하고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SERICEO에서 5년 간 ‘세상만사 경제학’ 강의를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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