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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온도] 잠든 아버지를 깨우는 딸, 그 계보의 서사 - 영화 원 배틀...
2026. 04. 11. 오전 12:04
84찬사의 소음과 이미지의 고요 사이에서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연출한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과 배우들. ⓒ 워너브러더스
작년에 평단이 크게 호명한 영화들 가운데, 끝내 글로 풀어내지 못한 작품 하나가 남아 있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였다. 몇 차례 초고를 시작했으나 번번이 멈췄다. 이유는 단순했다. 어쩌면 유치할 만큼 얕은 감정, 이른바 ‘PTA팬덤’을 향한 막연한 반감 때문이었다. 폴 토마스 앤더슨(PTA)의 신작이 도착할 때마다 시네필의 세계는 하나의 의식처럼 들끓는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폴 토마스 앤더슨, 2025)를 둘러싼 찬사는 그 열기를 극점까지 밀어 올렸다.
그러나 그 환호의 뒤편에는 미묘한 게으름이 번져 있다. 스스로를 시네필이라 부르는 이들이 이미 굳어버린 고전의 문법을 무리하게 호출하며 영화를 해석하려 든다. 화려한 미장센이라는 이름 아래 작품의 호흡을 가두는 습관도 낯설지 않다. 여기에 더해 비교에 대한 강박, 그리고 아카데미 노미네이트라는 제도적 권위에 기대려는 태도 역시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영화가 공개되자 평단은 기다렸다는 듯 로버트 알트먼의 산만한 활기, 토마스 핀천의 편집증적 서사를 불러왔다. 작품은 곧장 어떤 위대한 전통의 계승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는 영화를 정면으로 마주하기보다, 자신이 축적한 맥락을 드러내려는 과시처럼 보인다. 70mm 필름의 질감이나 롱테이크의 정교함을 찬미하는 동안, 영화가 품고 있는 동시대의 불안과 질문은 기술적 성취 뒤로 밀려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해독해야 할 각주처럼 변한다. 취향을 증명하는 장치로 기능하는 순간, 이미지의 생명은 급격히 식는다. 앤더슨의 영상이 정교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 듯 숭배되는 순간, 영화는 박물관의 유물처럼 굳어 버린다.
더 흥미로운 장면은 다른 곳에서 드러난다. 예술적 순수성을 말하던 이들이 아카데미 시상식 노미네이트 여부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이다. 배타적인 예술의 영역을 지키려 하면서도, 동시에 주류의 승인으로 자신의 취향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욕망. 그 이중성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노미네이트를 둘러싼 소음은 작품의 가치를 트로피의 가능성으로 환원한다. 시네필적 열광이 결국 제도적 인정으로 귀결되는 역설이 여기서 드러난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한 장면. ⓒ 워너브라더스
비평은 다른 자리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도식적인 해설이나 과거와의 억지스러운 연결이 아니라,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지금 이곳의 관객에게 건네는 불편한 이미지를 마주하는 일. 폐쇄적인 언어가 영화와 관객 사이의 거리를 벌리는 동안, 정작 영화가 품은 전투는 공허한 수사 속에서 희미해진다.
그렇다고 이 논의를 시네필의 허영을 드러내는 데서 멈출 수는 없다. 비평에 대한 비평이라는 닫힌 회로에 머무는 순간, 영화가 건네는 실존의 긴장 역시 옅어진다. 이제 시선은 다른 방향으로 옮겨야 한다.
70년대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유령에서 잠시 벗어나, 이 작품이 2020년대의 파편화된 세계 속에서 어떤 불안을 드러내는지 묻는 일. 그 질문 앞에서 영화는 단순한 스타일의 성취를 넘어선다. 무너진 가치와 흩어진 삶이 한 장면 속에서 다시 배열되는 순간, 이미지에는 조용한 떨림이 깃든다.
어쩌면 이 영화의 진짜 전투는 그곳에서 시작된다. 화려한 표면이 아니라, 그 아래에서 오래 머무는 인간의 불안 속에서.
지나간 혁명의 잔광, 남겨진 삶의 흔들림
밥 퍼거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대마초 연기 속에서 <알제리 전투>(질로 폰테코르보, 1966)를 바라본다. 거칠게 흔들리는 흑백의 화면, 식민지 저항의 문법이 스크린을 가로지른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전략으로 읽지 않는다. 오래된 기억을 더듬듯, 한때의 열기를 더듬듯 바라볼 뿐이다. 이 짧은 장면은 폴 토마스 앤더슨이 펼치려는 세계를 응축한다. 저항은 늘 지나간 이미지로 남고, 혁명가는 과거의 영웅과 자신을 겹쳐 보며 현재의 균열을 잠시 미룬다. 밥 역시 그 잔광 속에 머무는 인물이다.
그는 한때 ‘프렌치 75’의 일원이었다. 미-멕시코 국경의 이민자 수용소를 폭파하고, 은행을 털며 국가 폭력에 맞섰던 게릴라 조직. 그 이름은 1차 세계대전의 야포에서 왔다. 빠르고 강렬하지만 오래 남지 않는 포성. 그 명칭에는 이미 소멸의 시간이 새겨져 있었다.
1966년의 영화 <알제리 전투>는 1954년부터 1962년까지 이어진 알제리 독립투쟁을 다룬다. 프랑스 식민통치에 맞선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NL)의 무장 저항과 프랑스군의 폭력이 함께 기록된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이 뒤섞인 이 작품은 독립 이후 불과 3년 만에 제작되었다. 그래서 화면에는 아직 식지 않은 현실의 열기가 남아 있다. 회상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제국주의 프랑스의 학살과 탄압을 가리지 않는다. 그로 인해 프랑스에서는 30년 넘게 상영되지 못했다. 한국에 소개된 시점도 2009년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프랑스는 그 역사에 대해 충분히 사과하지 않았다.
폴 토마스 앤더슨이 <알제리 전투>를 불러온 이유는 단순한 오마주가 아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이어온 통제의 미학에서 한 걸음 물러나려는 선택에 가깝다. 정교하게 계산된 구도 대신, 통제되지 않는 역사의 현장으로 시선을 옮기려는 의지. 뉴스레일(Newsreel)의 거친 질감과 핸드헬드의 불안한 움직임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 다른 결로 되살아난다. 파편화된 개인을 다시 역사의 소용돌이로 밀어 넣는 장치로 작동한다.
극장 의자에 몸을 맡긴 채 70mm 필름의 우아함을 음미하는 시선과 달리, 앤더슨은 폰테코르보의 거친 감각을 끌어온다. 그 시선은 탐미의 평온을 깨뜨린다. 영화는 더 이상 감상의 대상에 머물지 않는다. 목격의 장면으로 바뀐다. 관객은 스크린 속 전투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도 이어지는 인간의 투쟁임을 감각한다. 이 호출은 또 다른 의미를 품는다. ‘박제된 거장’이라는 틀에서 벗어나려는 몸짓. 그는 아카데미가 선호하는 매끄러운 서사와 정교한 미장센을 일부러 비껴간다. 대신 남겨진 것은 혼돈과 열기, 그리고 끝나지 않은 혁명이다. 그렇게 영화는 제도권이 규정한 ‘좋은 영화’의 경계를 흔든다.
1966년 질로 콘테코르보 연출의 영화 '알제리 전투'. ⓒ 마그나
<알제리 전투>가 집단적 저항의 기록이었다면, 앤더슨의 호출은 다른 전선을 향한다. 영화 산업을 둘러싼 자본과 권위, 그리고 그것을 소비하는 비평의 허영을 겨냥한 시각적 게릴라전. 이 맥락에서 <알제리 전투>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도달하려는 진정성의 표지이자, 굳어진 담론을 흔드는 도구로 기능한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도입부 40분은 하나의 단편처럼 호흡한다. 중심에는 퍼피디아 비벌리 힐스(테야나 테일러)가 서 있다. 이민자 수용소 사령관을 무장 해제하는 순간, 인종과 성별, 권력의 균형이 단숨에 뒤집힌다.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은 마림바와 피아노 사이에서 미세하게 떨린다. 스릴러의 외피를 두른 정치적 선언처럼 울린다.
그러나 앤더슨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갑작스럽게 16년을 건너뛴다. 도약 이후, 밥은 전혀 다른 얼굴로 나타난다. 목욕 가운을 걸친 채 집 안을 서성이는 중년의 남자. 한때의 혁명가는 이제 딸의 역사 선생님을 찾아가는 평범한 아버지가 된다.
세대의 교체는 단순한 서사의 장치가 아니다. 하나의 구조로 작동한다. 저항의 언어는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가, 아니면 그 사이에서 끊어지는가. 결국 이 영화가 끝내 묻는 질문도 그곳을 향한다.
프렌치 75에는 암구호가 있다. 구성원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짧은 문장을 나눈다. 어둠 속에서 서로를 식별하는 언어. 그것은 1970년대 간첩 영화의 오래된 문법이면서, 동시에 성경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마태오 복음 25장. 기름을 준비한 신부와 그렇지 못한 신부의 비유. 신랑이 언제 올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깨어 있어야 한다.
이 이야기는 혁명 조직의 원리와도 닮아 있다. 습격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준비된 자만이 버틴다. 영화에서 ICE를 닮은 군사 조직 MKU가 들이닥칠 때, 프렌치 75의 일부는 잠들어 있다. 경계는 한순간 풀리고, 그 틈으로 폭력이 스며든다.
악당 스티븐 J. 록죠 대령(숀 펜)이 이끄는 조직은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과 연결된다. 그들은 서로를 “헤일 세인트 닉”이라 부른다. 처음에는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러나 이 기묘한 농담 뒤에는 더 어두운 모델이 숨어 있다. KKK의 초법적 신념, 테디 루즈벨트가 필리핀 점령에서 내세운 ‘문명화 사명’의 언어,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뒤집어 식민 지배를 정당화했던 역사.
영화는 이 악을 코믹하게 그린다. 하지만 웃음은 공포를 지우지 못한다. 오히려 더 또렷하게 드러낸다. 나치즘 역시 처음에는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비극은 늘 그렇게 시작되었다.
숀 펜이 연기한 록죠는 2025년 영화 속에서 가장 음산한 악당 가운데 하나다. 그는 단순한 폭력의 인물이 아니다. 믿음의 장비를 갖춘 인물이다. 신념은 반복되는 선율처럼 흐르고, 위협을 감지하는 편집증은 스캐너처럼 작동한다. 그의 행동은 언제나 도덕의 언어로 정당화된다. 그는 자신을 구원자라 믿는다. 그 확신이야말로 가장 섬뜩한 장면을 만든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한 장면. ⓒ 워너브라더스
“헤일 세인트 닉”이라는 구호는 겉으로 보면 유치한 장난에 가깝다. 그러나 웃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20세기 암흑기를 관통한 폭력의 그림자가 남는다. 우리가 목격했던 MAGA의 광기나 ICE의 비인간적 행정도 처음에는 시대착오적인 소동처럼 보였다.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 투정이 전쟁의 포성을 울리는 순간, 희극은 곧장 참극으로 변한다.
록죠 대령의 집무실에는 낡은 성경과 최첨단 스캐닝 장비가 함께 놓여 있다. 낯선 병치다. 그는 마태복음을 인용하며 자신을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신부”로 상상한다. 그러나 그가 준비한 기름은 등불을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다. 불순한 자를 태우기 위한 가솔린에 가깝다.
MKU의 습격 장면에서 록죠는 무전기를 통해 한 구절을 읊조린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마테오 복음 7:23)”. 이 말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다. 타자를 ‘문명화의 대상’조차 아닌 ‘말살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냉혹한 선언이다.
숀 펜의 연기는 이 장면에서 더욱 기이하게 빛난다. 그는 광기 어린 포효 대신, 잠든 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사를 건넨다. 그 순간 악은 평범함을 넘어선다. 일종의 신성한 확신을 입는다. 스캐너의 기계음은 전자음이 아니라, 불신자를 가려내는 신의 목소리처럼 울린다. 그 리듬 속에서 그는 스스로의 도덕적 완전함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 인물의 내면 논리는 2020년대 우익 포퓰리즘의 구조와도 닮아 있다. 배타적 신념은 ‘상식’이나 ‘사명’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그 안에서 폭력은 치료나 수술처럼 정당화된다. 영화에서 록죠가 프렌치 75의 거점을 초토화하며 보이는 평온한 얼굴은, 확신에 찬 근본주의가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드러낸다.
앤더슨은 록죠의 편집증을 스캐너의 시각적 인터페이스로 드러낸다. 관객은 그의 폭력을 멀리서 바라보지 못한다. 차가운 논리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그 순간 영화는 정치 스릴러의 경계를 넘어선다. 신념이 무기가 될 때 인간성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기록하는 잔혹한 보고서로 변한다.
록죠가 보여주는 ‘믿음의 장비’는 우리 시대의 음산한 거울이다. 그는 악을 저지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뒤틀린 성서적 정의와 식민의 사명을 수행한다고 믿을 뿐이다. 그래서 죄책감이 없다. 나치즘이 떠오르던 시기에도 사람들은 그들의 과장된 몸짓을 비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이 비명으로 바뀌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 위협이 일상이 된 세계에서 프렌치 75의 암구호는 단순한 식별 수단이 아니다. 살아남기 위한 윤리다. 마태오 복음의 비유처럼, 기름을 준비하고 깨어 있는 사람만이 예고 없이 찾아오는 MKU의 습격, 혹은 역사의 퇴행을 견딜 수 있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한 장면. ⓒ 워너브라더스
세대가 교체되는 시대에는 과거를 밀어내려는 충동도 함께 자란다. 그러나 위험한 망령을 다시 부르는 일은 결국 우리가 서 있는 땅을 무너뜨린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세대를 가르는 벽이 아니다. 서로의 마음이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하나의 언어다. 그것은 십 년 전 광장을 밝히던 촛불일 수도 있고, 계엄의 어둠 속에서 서로를 알아보게 했던 응원봉의 불빛일 수도 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그 암구호를 잊은 채 잠든 이들에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신랑이 오기 전, 등불을 다시 살피라고.
밥 주변에는 낯선 이름들이 모인다. 그링고 코요테, 빌리 고트, 로켓맨, 게토 펫. 혈연으로 이어진 이들이 아니다. 이념에 의해 호출된 사람들이다. 처음에는 임시로 엮인 동지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이 느슨한 결합이 때로는 혈연보다 깊게 작동하는 순간을 비춘다. 서로를 부르고, 서로를 지키며, 같은 위험 속에서 숨을 나눈다.
그러나 폴 토마스 앤더슨은 그 결속을 오래 붙들지 않는다. 시선은 곧장 균열로 향한다. 이 공동체가 어디에서 흔들리는지, 무엇이 내부를 갈라놓는지 집요하게 비춘다.
“모든 혁명은 악마와 싸우다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으로 끝난다.”
이 대사는 가볍게 흘러가지만 오래 남는다. 프렌치 75는 외부의 적만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더 깊은 균열은 내부에서 생긴다. 신뢰의 틈, 이념의 순수성을 둘러싼 다툼, 누가 더 진짜인가를 묻는 소모적인 논쟁.
이 장면들은 낯설지 않다. 스타워즈의 반란군도 내부 분열을 겪었고, 늑대와 춤을의 케빈 코스트너는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내려놓아야 했다. 이 영화의 인물들 역시 같은 진동 위에 서 있다. 소속과 이탈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린다.
가장 복잡한 인물은 와일라(체이스 인피니티)다. 밥의 딸, 혁명가의 두 번째 세대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의 언어를 알지 못한다. 암구호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그 전쟁을 직접 겪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혁명은 그녀에게 설명되어야 할 이야기로 남는다. 살아낸 기억이 아니라 해석해야 할 역사. 이 지점에서 계승의 비극이 시작된다. 언어는 전달되지만, 경험 없는 언어는 쉽게 공백이 된다. 딸은 같은 세계를 물려받지만 같은 방식으로 싸울 수 없다.
퍼피디아의 한 문장도 그 틈을 드러낸다.
"This pussy don't pop for you."
이 말은 단순한 도발이 아니다. 혁명 내부에 숨은 성정치학을 드러내는 선언이다. 남성 중심의 오래된 습관, 여성의 몸을 전리품처럼 다루는 시선을 단호히 거부한다. 퍼피디아는 공동체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자신의 몸과 의지를 반복해서 확인해야 한다. 혁명은 자동으로 평등을 보장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 결함을 조용히 드러낸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한 장면. ⓒ 워너브라더스
부모와 자식의 갈등은 오래된 이야기다. 성경에는 아브라함과 이사악이 있고, 역사에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이 있다. 신화 속 제우스는 아버지 크로노스를 넘어선다. 이 관계는 인간사의 깊은 층위에 놓인 오래된 구조처럼 보인다. 영화는 그 틀을 살짝 비튼다.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로 옮겨 놓는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세대 간의 긴장은 언제나 현재형이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상처를 남긴다. 이해를 바라면서도 원망을 쏟는다. 이 양가적 감정이 시간의 흐름을 밀어 올린다. 사랑만으로도, 증오만으로도 역사는 움직이지 않는다. 겉으로는 같은 길을 걷는 듯 보이지만, 서로 다른 시계를 차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함께 웃다가도 등을 돌린다.
그렇게 길을 걷다 보면, 아들들은 어느 순간 아버지가 된다. 떠난 이들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 속에서 다시 모습을 얻는다. 지금의 부모 역시 먼 훗날 또 다른 세대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날 것이다.
가족계획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족은 계획되지 않는다. 퍼피디아와 밥의 딸 와일라는 혁명의 부산물로 태어났다. 록죠가 그녀를 추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녀는 실패를 증명하는 살아 있는 흔적이다. 그래서 가족은 단순한 혈연이 아니다. 하나의 정치적 위협이다. 와일라의 존재는 저항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말한다. 그 연결이 미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 국가는 바로 그 가능성을 두려워한다.
영화의 마지막 질문도 그 지점에 머문다. 깨어 있는 신부는 누구인가. 다음 세대인가, 아니면 지금의 세대인가. 기름을 준비한 자는 어디에 있는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그 오래된 질문을 다시 꺼내 든다. 가족은 해체되지만, 다른 방식으로 다시 엮인다. 그리고 그 재조립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나의 방향이다. 함께 믿는 마음. 가족은 피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같은 곳을 바라볼 때, 비로소 다시 태어난다.
베니치오 델 토로가 연기한 센세이 세르지오 성 카를로스는 이 영화에서 가장 낮은 목소리를 지닌 인물이다. 그는 이민자들을 탈출시키는 지하 조직을 이끈다. 말수는 적고, 몸짓은 절제되어 있다. 가라테 사범처럼 고요하고, 추적자의 감각으로 지형을 읽는다.
그에게는 프렌치 75의 화력이 없다. 대신 길을 안다. 사람을 숨길 자리와 다음 경계의 위치를 안다. 그렇게 그는 누군가를 국경 너머로 보낸다. 이름 없이, 소리 없이. 영화는 이 인물을 통해 또 하나의 저항을 보여준다. 구호 대신 이동, 기록되지 않는 구조, 다음 세대를 안전으로 넘기는 오래된 기술.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한 장면. ⓒ 워너브라더스
비스타 비전(VistaVision)의 화면은 이 이야기들을 넓은 풍경 위에 펼쳐 놓는다. 사라졌던 포맷은 캘리포니아의 땅을 서부극처럼 열어 보인다. 국경의 메마른 평원, 보레고 스프링스의 협곡, 끝없이 이어지는 고속도로의 추격.
이 땅은 황야의 7인이 서 있던 자리다. 동시에 오늘의 이민자 수용소가 세워진 장소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이 오래된 풍경에 현재의 공포를 겹친다. 화면은 서부극의 문법을 따르지만, 감각은 뉴스처럼 차갑다. 신화와 현실이 한 프레임에서 맞닿는다.
밥은 오래 잠들어 있었다. 대마초 연기 속에서, 낡은 <알제리 전투>의 장면 속에서 시간을 흘려보낸다. 과거를 반복하며 현재를 잃는다. 와일라가 도착한 뒤에야 그는 눈을 뜬다. 딸이 아버지를 깨운다. 세대교체는 횃불의 전달이 아니다. 잠든 어깨를 흔드는 일이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승리를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실패의 구조를 드러낸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다. 싸움은 다음 세대로 옮겨 간다. 더 낯선 방식, 더 새로운 언어로. 그래서 이 작품은 단절이 아니라 질문으로 남는다. 혁명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얼굴을 바꾼다.
이 영화를 둘러싼 시네필의 언어는 종종 기술로 기울어진다. 70mm 필름의 질감, 광각 렌즈의 왜곡 같은 말들이 반복된다. 영화는 살아 있는 이야기보다 분석 가능한 장치로 다뤄진다. 로버트 알트먼의 다성성(Polyphony), 스탠리 큐브릭의 대칭미가 소환되지만, 프레임 안의 얼굴은 쉽게 지나친다. 삶보다 이론이 앞선다.
미장센이라는 단어 역시 그렇다. 때로 그것은 깊이를 여는 열쇠가 아니라 벽이 된다. 기술을 칭찬하는 말이 늘수록 정동은 옅어진다. 관객은 해독의 자리에 놓인다. 이 ‘박제식 비평’은 영화를 현재에서 떼어낸다. 살아 있는 매체를 과거의 자료처럼 만든다.
더 아이러니한 장면도 있다. 순수성을 말하던 팬덤이 아카데미 시상식의 후보 발표에 흔들릴 때다. 산업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그 트로피를 통해 취향의 승인을 얻으려 한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오스카 후보에 오르는 순간, 담론은 분석에서 확률로 옮겨 간다.
아카데미는 어느새 기준이 아니라 도장이 된다. 그러나 그 권위는 시선을 흐린다. 작품은 후광 속에서 소비된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한 장면. ⓒ 워너브라더스
결국 이 영화가 도달한 곳은 평온한 교체가 아니다. 잠든 이를 깨우는 자리다. 비스타 비전(VistaVision)의 넓은 화면에 감탄하는 동안, 영화는 그 아래 숨은 오늘의 지옥을 드러낸다. 철조망과 초법적 폭력. 밥이 연기와 기억 속을 떠도는 사이, 와일라는 살아남기 위해 그를 흔든다. 앤더슨의 비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혹시 미장센을 해독하고 트로피를 점치며 안락한 꿈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 현실의 괴물이 국경을 넘는 순간에도, 우리의 언어는 여전히 필름의 입자에 붙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센세이 세르지오 성 카를로스(베니치오 델 토로)의 조용한 실천이 답한다. 영화적 행위는 화려한 수사가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읽고, 그들을 안전으로 건네는 일이다.
혁명은 사라지지 않는다. 얼굴만 바꾼다. 영화도 그렇다. 낡은 문법을 지나 새로운 언어로 나아간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그 과정의 상처를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비평이 서야 할 자리도 묻는다. 레드카펫이 아니라, 바람이 부는 광장 위에서.
이제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등불의 기름을 준비하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 잠들어 있는가.
스크린이 꺼진 뒤에도, 이 영화의 암구호는 오래 남는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묻는다. 정말로 깨어 있는가.
IBM과 NTT에서 마케팅과 컨설팅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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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연출한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과 배우들. ⓒ 워너브러더스
작년에 평단이 크게 호명한 영화들 가운데, 끝내 글로 풀어내지 못한 작품 하나가 남아 있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였다. 몇 차례 초고를 시작했으나 번번이 멈췄다. 이유는 단순했다. 어쩌면 유치할 만큼 얕은 감정, 이른바 ‘PTA팬덤’을 향한 막연한 반감 때문이었다. 폴 토마스 앤더슨(PTA)의 신작이 도착할 때마다 시네필의 세계는 하나의 의식처럼 들끓는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폴 토마스 앤더슨, 2025)를 둘러싼 찬사는 그 열기를 극점까지 밀어 올렸다.
그러나 그 환호의 뒤편에는 미묘한 게으름이 번져 있다. 스스로를 시네필이라 부르는 이들이 이미 굳어버린 고전의 문법을 무리하게 호출하며 영화를 해석하려 든다. 화려한 미장센이라는 이름 아래 작품의 호흡을 가두는 습관도 낯설지 않다. 여기에 더해 비교에 대한 강박, 그리고 아카데미 노미네이트라는 제도적 권위에 기대려는 태도 역시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영화가 공개되자 평단은 기다렸다는 듯 로버트 알트먼의 산만한 활기, 토마스 핀천의 편집증적 서사를 불러왔다. 작품은 곧장 어떤 위대한 전통의 계승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는 영화를 정면으로 마주하기보다, 자신이 축적한 맥락을 드러내려는 과시처럼 보인다. 70mm 필름의 질감이나 롱테이크의 정교함을 찬미하는 동안, 영화가 품고 있는 동시대의 불안과 질문은 기술적 성취 뒤로 밀려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해독해야 할 각주처럼 변한다. 취향을 증명하는 장치로 기능하는 순간, 이미지의 생명은 급격히 식는다. 앤더슨의 영상이 정교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 듯 숭배되는 순간, 영화는 박물관의 유물처럼 굳어 버린다.
더 흥미로운 장면은 다른 곳에서 드러난다. 예술적 순수성을 말하던 이들이 아카데미 시상식 노미네이트 여부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이다. 배타적인 예술의 영역을 지키려 하면서도, 동시에 주류의 승인으로 자신의 취향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욕망. 그 이중성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노미네이트를 둘러싼 소음은 작품의 가치를 트로피의 가능성으로 환원한다. 시네필적 열광이 결국 제도적 인정으로 귀결되는 역설이 여기서 드러난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한 장면. ⓒ 워너브라더스
비평은 다른 자리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도식적인 해설이나 과거와의 억지스러운 연결이 아니라,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지금 이곳의 관객에게 건네는 불편한 이미지를 마주하는 일. 폐쇄적인 언어가 영화와 관객 사이의 거리를 벌리는 동안, 정작 영화가 품은 전투는 공허한 수사 속에서 희미해진다.
그렇다고 이 논의를 시네필의 허영을 드러내는 데서 멈출 수는 없다. 비평에 대한 비평이라는 닫힌 회로에 머무는 순간, 영화가 건네는 실존의 긴장 역시 옅어진다. 이제 시선은 다른 방향으로 옮겨야 한다.
70년대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유령에서 잠시 벗어나, 이 작품이 2020년대의 파편화된 세계 속에서 어떤 불안을 드러내는지 묻는 일. 그 질문 앞에서 영화는 단순한 스타일의 성취를 넘어선다. 무너진 가치와 흩어진 삶이 한 장면 속에서 다시 배열되는 순간, 이미지에는 조용한 떨림이 깃든다.
어쩌면 이 영화의 진짜 전투는 그곳에서 시작된다. 화려한 표면이 아니라, 그 아래에서 오래 머무는 인간의 불안 속에서.
지나간 혁명의 잔광, 남겨진 삶의 흔들림
밥 퍼거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대마초 연기 속에서 <알제리 전투>(질로 폰테코르보, 1966)를 바라본다. 거칠게 흔들리는 흑백의 화면, 식민지 저항의 문법이 스크린을 가로지른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전략으로 읽지 않는다. 오래된 기억을 더듬듯, 한때의 열기를 더듬듯 바라볼 뿐이다. 이 짧은 장면은 폴 토마스 앤더슨이 펼치려는 세계를 응축한다. 저항은 늘 지나간 이미지로 남고, 혁명가는 과거의 영웅과 자신을 겹쳐 보며 현재의 균열을 잠시 미룬다. 밥 역시 그 잔광 속에 머무는 인물이다.
그는 한때 ‘프렌치 75’의 일원이었다. 미-멕시코 국경의 이민자 수용소를 폭파하고, 은행을 털며 국가 폭력에 맞섰던 게릴라 조직. 그 이름은 1차 세계대전의 야포에서 왔다. 빠르고 강렬하지만 오래 남지 않는 포성. 그 명칭에는 이미 소멸의 시간이 새겨져 있었다.
1966년의 영화 <알제리 전투>는 1954년부터 1962년까지 이어진 알제리 독립투쟁을 다룬다. 프랑스 식민통치에 맞선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NL)의 무장 저항과 프랑스군의 폭력이 함께 기록된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이 뒤섞인 이 작품은 독립 이후 불과 3년 만에 제작되었다. 그래서 화면에는 아직 식지 않은 현실의 열기가 남아 있다. 회상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제국주의 프랑스의 학살과 탄압을 가리지 않는다. 그로 인해 프랑스에서는 30년 넘게 상영되지 못했다. 한국에 소개된 시점도 2009년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프랑스는 그 역사에 대해 충분히 사과하지 않았다.
폴 토마스 앤더슨이 <알제리 전투>를 불러온 이유는 단순한 오마주가 아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이어온 통제의 미학에서 한 걸음 물러나려는 선택에 가깝다. 정교하게 계산된 구도 대신, 통제되지 않는 역사의 현장으로 시선을 옮기려는 의지. 뉴스레일(Newsreel)의 거친 질감과 핸드헬드의 불안한 움직임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 다른 결로 되살아난다. 파편화된 개인을 다시 역사의 소용돌이로 밀어 넣는 장치로 작동한다.
극장 의자에 몸을 맡긴 채 70mm 필름의 우아함을 음미하는 시선과 달리, 앤더슨은 폰테코르보의 거친 감각을 끌어온다. 그 시선은 탐미의 평온을 깨뜨린다. 영화는 더 이상 감상의 대상에 머물지 않는다. 목격의 장면으로 바뀐다. 관객은 스크린 속 전투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도 이어지는 인간의 투쟁임을 감각한다. 이 호출은 또 다른 의미를 품는다. ‘박제된 거장’이라는 틀에서 벗어나려는 몸짓. 그는 아카데미가 선호하는 매끄러운 서사와 정교한 미장센을 일부러 비껴간다. 대신 남겨진 것은 혼돈과 열기, 그리고 끝나지 않은 혁명이다. 그렇게 영화는 제도권이 규정한 ‘좋은 영화’의 경계를 흔든다.
1966년 질로 콘테코르보 연출의 영화 '알제리 전투'. ⓒ 마그나
<알제리 전투>가 집단적 저항의 기록이었다면, 앤더슨의 호출은 다른 전선을 향한다. 영화 산업을 둘러싼 자본과 권위, 그리고 그것을 소비하는 비평의 허영을 겨냥한 시각적 게릴라전. 이 맥락에서 <알제리 전투>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도달하려는 진정성의 표지이자, 굳어진 담론을 흔드는 도구로 기능한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도입부 40분은 하나의 단편처럼 호흡한다. 중심에는 퍼피디아 비벌리 힐스(테야나 테일러)가 서 있다. 이민자 수용소 사령관을 무장 해제하는 순간, 인종과 성별, 권력의 균형이 단숨에 뒤집힌다.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은 마림바와 피아노 사이에서 미세하게 떨린다. 스릴러의 외피를 두른 정치적 선언처럼 울린다.
그러나 앤더슨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갑작스럽게 16년을 건너뛴다. 도약 이후, 밥은 전혀 다른 얼굴로 나타난다. 목욕 가운을 걸친 채 집 안을 서성이는 중년의 남자. 한때의 혁명가는 이제 딸의 역사 선생님을 찾아가는 평범한 아버지가 된다.
세대의 교체는 단순한 서사의 장치가 아니다. 하나의 구조로 작동한다. 저항의 언어는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가, 아니면 그 사이에서 끊어지는가. 결국 이 영화가 끝내 묻는 질문도 그곳을 향한다.
프렌치 75에는 암구호가 있다. 구성원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짧은 문장을 나눈다. 어둠 속에서 서로를 식별하는 언어. 그것은 1970년대 간첩 영화의 오래된 문법이면서, 동시에 성경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마태오 복음 25장. 기름을 준비한 신부와 그렇지 못한 신부의 비유. 신랑이 언제 올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깨어 있어야 한다.
이 이야기는 혁명 조직의 원리와도 닮아 있다. 습격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준비된 자만이 버틴다. 영화에서 ICE를 닮은 군사 조직 MKU가 들이닥칠 때, 프렌치 75의 일부는 잠들어 있다. 경계는 한순간 풀리고, 그 틈으로 폭력이 스며든다.
악당 스티븐 J. 록죠 대령(숀 펜)이 이끄는 조직은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과 연결된다. 그들은 서로를 “헤일 세인트 닉”이라 부른다. 처음에는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러나 이 기묘한 농담 뒤에는 더 어두운 모델이 숨어 있다. KKK의 초법적 신념, 테디 루즈벨트가 필리핀 점령에서 내세운 ‘문명화 사명’의 언어,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뒤집어 식민 지배를 정당화했던 역사.
영화는 이 악을 코믹하게 그린다. 하지만 웃음은 공포를 지우지 못한다. 오히려 더 또렷하게 드러낸다. 나치즘 역시 처음에는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비극은 늘 그렇게 시작되었다.
숀 펜이 연기한 록죠는 2025년 영화 속에서 가장 음산한 악당 가운데 하나다. 그는 단순한 폭력의 인물이 아니다. 믿음의 장비를 갖춘 인물이다. 신념은 반복되는 선율처럼 흐르고, 위협을 감지하는 편집증은 스캐너처럼 작동한다. 그의 행동은 언제나 도덕의 언어로 정당화된다. 그는 자신을 구원자라 믿는다. 그 확신이야말로 가장 섬뜩한 장면을 만든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한 장면. ⓒ 워너브라더스
“헤일 세인트 닉”이라는 구호는 겉으로 보면 유치한 장난에 가깝다. 그러나 웃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20세기 암흑기를 관통한 폭력의 그림자가 남는다. 우리가 목격했던 MAGA의 광기나 ICE의 비인간적 행정도 처음에는 시대착오적인 소동처럼 보였다.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 투정이 전쟁의 포성을 울리는 순간, 희극은 곧장 참극으로 변한다.
록죠 대령의 집무실에는 낡은 성경과 최첨단 스캐닝 장비가 함께 놓여 있다. 낯선 병치다. 그는 마태복음을 인용하며 자신을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신부”로 상상한다. 그러나 그가 준비한 기름은 등불을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다. 불순한 자를 태우기 위한 가솔린에 가깝다.
MKU의 습격 장면에서 록죠는 무전기를 통해 한 구절을 읊조린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마테오 복음 7:23)”. 이 말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다. 타자를 ‘문명화의 대상’조차 아닌 ‘말살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냉혹한 선언이다.
숀 펜의 연기는 이 장면에서 더욱 기이하게 빛난다. 그는 광기 어린 포효 대신, 잠든 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사를 건넨다. 그 순간 악은 평범함을 넘어선다. 일종의 신성한 확신을 입는다. 스캐너의 기계음은 전자음이 아니라, 불신자를 가려내는 신의 목소리처럼 울린다. 그 리듬 속에서 그는 스스로의 도덕적 완전함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 인물의 내면 논리는 2020년대 우익 포퓰리즘의 구조와도 닮아 있다. 배타적 신념은 ‘상식’이나 ‘사명’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그 안에서 폭력은 치료나 수술처럼 정당화된다. 영화에서 록죠가 프렌치 75의 거점을 초토화하며 보이는 평온한 얼굴은, 확신에 찬 근본주의가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드러낸다.
앤더슨은 록죠의 편집증을 스캐너의 시각적 인터페이스로 드러낸다. 관객은 그의 폭력을 멀리서 바라보지 못한다. 차가운 논리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그 순간 영화는 정치 스릴러의 경계를 넘어선다. 신념이 무기가 될 때 인간성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기록하는 잔혹한 보고서로 변한다.
록죠가 보여주는 ‘믿음의 장비’는 우리 시대의 음산한 거울이다. 그는 악을 저지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뒤틀린 성서적 정의와 식민의 사명을 수행한다고 믿을 뿐이다. 그래서 죄책감이 없다. 나치즘이 떠오르던 시기에도 사람들은 그들의 과장된 몸짓을 비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이 비명으로 바뀌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 위협이 일상이 된 세계에서 프렌치 75의 암구호는 단순한 식별 수단이 아니다. 살아남기 위한 윤리다. 마태오 복음의 비유처럼, 기름을 준비하고 깨어 있는 사람만이 예고 없이 찾아오는 MKU의 습격, 혹은 역사의 퇴행을 견딜 수 있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한 장면. ⓒ 워너브라더스
세대가 교체되는 시대에는 과거를 밀어내려는 충동도 함께 자란다. 그러나 위험한 망령을 다시 부르는 일은 결국 우리가 서 있는 땅을 무너뜨린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세대를 가르는 벽이 아니다. 서로의 마음이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하나의 언어다. 그것은 십 년 전 광장을 밝히던 촛불일 수도 있고, 계엄의 어둠 속에서 서로를 알아보게 했던 응원봉의 불빛일 수도 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그 암구호를 잊은 채 잠든 이들에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신랑이 오기 전, 등불을 다시 살피라고.
밥 주변에는 낯선 이름들이 모인다. 그링고 코요테, 빌리 고트, 로켓맨, 게토 펫. 혈연으로 이어진 이들이 아니다. 이념에 의해 호출된 사람들이다. 처음에는 임시로 엮인 동지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이 느슨한 결합이 때로는 혈연보다 깊게 작동하는 순간을 비춘다. 서로를 부르고, 서로를 지키며, 같은 위험 속에서 숨을 나눈다.
그러나 폴 토마스 앤더슨은 그 결속을 오래 붙들지 않는다. 시선은 곧장 균열로 향한다. 이 공동체가 어디에서 흔들리는지, 무엇이 내부를 갈라놓는지 집요하게 비춘다.
“모든 혁명은 악마와 싸우다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으로 끝난다.”
이 대사는 가볍게 흘러가지만 오래 남는다. 프렌치 75는 외부의 적만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더 깊은 균열은 내부에서 생긴다. 신뢰의 틈, 이념의 순수성을 둘러싼 다툼, 누가 더 진짜인가를 묻는 소모적인 논쟁.
이 장면들은 낯설지 않다. 스타워즈의 반란군도 내부 분열을 겪었고, 늑대와 춤을의 케빈 코스트너는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내려놓아야 했다. 이 영화의 인물들 역시 같은 진동 위에 서 있다. 소속과 이탈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린다.
가장 복잡한 인물은 와일라(체이스 인피니티)다. 밥의 딸, 혁명가의 두 번째 세대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의 언어를 알지 못한다. 암구호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그 전쟁을 직접 겪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혁명은 그녀에게 설명되어야 할 이야기로 남는다. 살아낸 기억이 아니라 해석해야 할 역사. 이 지점에서 계승의 비극이 시작된다. 언어는 전달되지만, 경험 없는 언어는 쉽게 공백이 된다. 딸은 같은 세계를 물려받지만 같은 방식으로 싸울 수 없다.
퍼피디아의 한 문장도 그 틈을 드러낸다.
"This pussy don't pop for you."
이 말은 단순한 도발이 아니다. 혁명 내부에 숨은 성정치학을 드러내는 선언이다. 남성 중심의 오래된 습관, 여성의 몸을 전리품처럼 다루는 시선을 단호히 거부한다. 퍼피디아는 공동체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자신의 몸과 의지를 반복해서 확인해야 한다. 혁명은 자동으로 평등을 보장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 결함을 조용히 드러낸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한 장면. ⓒ 워너브라더스
부모와 자식의 갈등은 오래된 이야기다. 성경에는 아브라함과 이사악이 있고, 역사에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이 있다. 신화 속 제우스는 아버지 크로노스를 넘어선다. 이 관계는 인간사의 깊은 층위에 놓인 오래된 구조처럼 보인다. 영화는 그 틀을 살짝 비튼다.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로 옮겨 놓는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세대 간의 긴장은 언제나 현재형이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상처를 남긴다. 이해를 바라면서도 원망을 쏟는다. 이 양가적 감정이 시간의 흐름을 밀어 올린다. 사랑만으로도, 증오만으로도 역사는 움직이지 않는다. 겉으로는 같은 길을 걷는 듯 보이지만, 서로 다른 시계를 차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함께 웃다가도 등을 돌린다.
그렇게 길을 걷다 보면, 아들들은 어느 순간 아버지가 된다. 떠난 이들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 속에서 다시 모습을 얻는다. 지금의 부모 역시 먼 훗날 또 다른 세대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날 것이다.
가족계획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족은 계획되지 않는다. 퍼피디아와 밥의 딸 와일라는 혁명의 부산물로 태어났다. 록죠가 그녀를 추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녀는 실패를 증명하는 살아 있는 흔적이다. 그래서 가족은 단순한 혈연이 아니다. 하나의 정치적 위협이다. 와일라의 존재는 저항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말한다. 그 연결이 미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 국가는 바로 그 가능성을 두려워한다.
영화의 마지막 질문도 그 지점에 머문다. 깨어 있는 신부는 누구인가. 다음 세대인가, 아니면 지금의 세대인가. 기름을 준비한 자는 어디에 있는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그 오래된 질문을 다시 꺼내 든다. 가족은 해체되지만, 다른 방식으로 다시 엮인다. 그리고 그 재조립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나의 방향이다. 함께 믿는 마음. 가족은 피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같은 곳을 바라볼 때, 비로소 다시 태어난다.
베니치오 델 토로가 연기한 센세이 세르지오 성 카를로스는 이 영화에서 가장 낮은 목소리를 지닌 인물이다. 그는 이민자들을 탈출시키는 지하 조직을 이끈다. 말수는 적고, 몸짓은 절제되어 있다. 가라테 사범처럼 고요하고, 추적자의 감각으로 지형을 읽는다.
그에게는 프렌치 75의 화력이 없다. 대신 길을 안다. 사람을 숨길 자리와 다음 경계의 위치를 안다. 그렇게 그는 누군가를 국경 너머로 보낸다. 이름 없이, 소리 없이. 영화는 이 인물을 통해 또 하나의 저항을 보여준다. 구호 대신 이동, 기록되지 않는 구조, 다음 세대를 안전으로 넘기는 오래된 기술.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한 장면. ⓒ 워너브라더스
비스타 비전(VistaVision)의 화면은 이 이야기들을 넓은 풍경 위에 펼쳐 놓는다. 사라졌던 포맷은 캘리포니아의 땅을 서부극처럼 열어 보인다. 국경의 메마른 평원, 보레고 스프링스의 협곡, 끝없이 이어지는 고속도로의 추격.
이 땅은 황야의 7인이 서 있던 자리다. 동시에 오늘의 이민자 수용소가 세워진 장소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이 오래된 풍경에 현재의 공포를 겹친다. 화면은 서부극의 문법을 따르지만, 감각은 뉴스처럼 차갑다. 신화와 현실이 한 프레임에서 맞닿는다.
밥은 오래 잠들어 있었다. 대마초 연기 속에서, 낡은 <알제리 전투>의 장면 속에서 시간을 흘려보낸다. 과거를 반복하며 현재를 잃는다. 와일라가 도착한 뒤에야 그는 눈을 뜬다. 딸이 아버지를 깨운다. 세대교체는 횃불의 전달이 아니다. 잠든 어깨를 흔드는 일이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승리를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실패의 구조를 드러낸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다. 싸움은 다음 세대로 옮겨 간다. 더 낯선 방식, 더 새로운 언어로. 그래서 이 작품은 단절이 아니라 질문으로 남는다. 혁명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얼굴을 바꾼다.
이 영화를 둘러싼 시네필의 언어는 종종 기술로 기울어진다. 70mm 필름의 질감, 광각 렌즈의 왜곡 같은 말들이 반복된다. 영화는 살아 있는 이야기보다 분석 가능한 장치로 다뤄진다. 로버트 알트먼의 다성성(Polyphony), 스탠리 큐브릭의 대칭미가 소환되지만, 프레임 안의 얼굴은 쉽게 지나친다. 삶보다 이론이 앞선다.
미장센이라는 단어 역시 그렇다. 때로 그것은 깊이를 여는 열쇠가 아니라 벽이 된다. 기술을 칭찬하는 말이 늘수록 정동은 옅어진다. 관객은 해독의 자리에 놓인다. 이 ‘박제식 비평’은 영화를 현재에서 떼어낸다. 살아 있는 매체를 과거의 자료처럼 만든다.
더 아이러니한 장면도 있다. 순수성을 말하던 팬덤이 아카데미 시상식의 후보 발표에 흔들릴 때다. 산업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그 트로피를 통해 취향의 승인을 얻으려 한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오스카 후보에 오르는 순간, 담론은 분석에서 확률로 옮겨 간다.
아카데미는 어느새 기준이 아니라 도장이 된다. 그러나 그 권위는 시선을 흐린다. 작품은 후광 속에서 소비된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한 장면. ⓒ 워너브라더스
결국 이 영화가 도달한 곳은 평온한 교체가 아니다. 잠든 이를 깨우는 자리다. 비스타 비전(VistaVision)의 넓은 화면에 감탄하는 동안, 영화는 그 아래 숨은 오늘의 지옥을 드러낸다. 철조망과 초법적 폭력. 밥이 연기와 기억 속을 떠도는 사이, 와일라는 살아남기 위해 그를 흔든다. 앤더슨의 비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혹시 미장센을 해독하고 트로피를 점치며 안락한 꿈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 현실의 괴물이 국경을 넘는 순간에도, 우리의 언어는 여전히 필름의 입자에 붙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센세이 세르지오 성 카를로스(베니치오 델 토로)의 조용한 실천이 답한다. 영화적 행위는 화려한 수사가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읽고, 그들을 안전으로 건네는 일이다.
혁명은 사라지지 않는다. 얼굴만 바꾼다. 영화도 그렇다. 낡은 문법을 지나 새로운 언어로 나아간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그 과정의 상처를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비평이 서야 할 자리도 묻는다. 레드카펫이 아니라, 바람이 부는 광장 위에서.
이제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등불의 기름을 준비하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 잠들어 있는가.
스크린이 꺼진 뒤에도, 이 영화의 암구호는 오래 남는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묻는다. 정말로 깨어 있는가.
IBM과 NTT에서 마케팅과 컨설팅 담당
비평적 글쓰기, 질병과 사회, 예술과 인간을 관통하는 잡문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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