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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민이 오빠’의 부활… 좌절 끝 '우승 감독' 된 이상민 [이달의 스포...
2026. 05. 23. 오후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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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민 KCC 감독이 13일 경기 고양소노아레나에서 열린 2025~26시즌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5차전에서 고양 소노를 꺾고 우승을 차지한 뒤 그물을 자르고 엄지를 치켜들고 있다. 뉴스1
“난 실패한 감독, 마지막이란 각오로 왔다.”
감독은 취임 자리에서 자신을 ‘실패한 감독’이라 표현했다. 스타 선수 출신 지도자가 입 밖에 꺼내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나 1년 뒤, 그는 정규리그 6위 팀을 이끌고 사상 첫 ‘6위의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일궈 냈다. 한국 농구사에서도 가장 극적인 드라마로 기억될 만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슈퍼스타가 추락의 끝에서 다시 일어나 가장 빛났던 자리로 돌아온 이야기다.
2007년 KCC 유니폼을 입고 마지막으로 뛸 당시의 이상민 감독. KCC 제공
'영원한 오빠' '산소 같은 남자' '컴퓨터 가드'. 이상민 감독은 설명이 필요 없는 자타공인 한국 농구의 아이콘이다. 농구인들은 강동희, 김승현 등을 제치고 역대 최고의 가드로 이 감독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연세대 농구부 시절, 그는
과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고, 프로 현대 시절엔 조니 맥도웰과의 픽앤롤로 ‘알고도 막지 못하는 공격’을 완성하며 리그를 지배했다. 이후 KCC에선 '이(상민)·조(성원)·추(승균)' 트리오의 한 축으로 전성기를 이끌었다.
경기를 조율하는 넓은 시야와 영리한 패스, 정확한 중거리 슛, 강력한 카리스마 등 포인트 가드의 덕목은 물론, 성실하고 반듯한 이미지까지 갖춰 '오빠 부대'를 몰고 다니며 화려한 인기를 누렸다.
연세대 시절부터 이 감독은 코트 위의 아이돌이었다. 그가 등장할 때마다 비명이 터졌고, 숙소 앞에는 밤마다 팬들이 몰려들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 속 주인공 (성)나정이가 죽고 못 사는 ‘상민이 오빠’가 바로 이상민 감독이었다. 이 감독은 1990년대 초중반 '농구대잔치 세대'를 대표하는 선수로 한국 농구의 르네상스를 주도했고, 연세대 재학 시절 '대학팀 최초의 농구대잔치 통합 우승'을 이끌었다.
현대와 그 후신인 KCC 유니폼을 입고 그는 13시즌간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 우승 각 3회, 정규리그 MVP 2회, 챔프전 MVP 1회 등 누구보다 화려한 선수 생활을 보냈다. 팬들의 사랑은 숫자로도 증명돼 프로농구 올스타 팬 투표가 시작된 2001~02시즌부터 2010년 은퇴할 때까지 단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준 적이 없다.
과 아시안게임 등 국제 무대를 누볐다. 특히 20년 만에 금메달을 획득한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필리핀과 준결승에서 경기 종료 직전 터뜨린 이 감독의 역전 3점 슛은 지금도 한국 농구 최고의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2008년 서울 삼성 시절 친정팀 KCC와 상대하고 있는 이상민 감독. 연합뉴스
충격의 삼성행... 좌절 뒤에 찾아온 기회
화려했던 선수 생활에도 그의 농구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2007년 그는 자유계약선수(FA) 서장훈의 보상선수로 서울 삼성으로 옮겼다. 삼성은 KCC의 전신인 현대 시절부터 재계와 스포츠를 대표하는 라이벌 구도였다. 그래서 KCC 간판스타인 이상민의 삼성 이적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줄곧 “KCC에서 은퇴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 왔고, 팀의 샐러리캡 부담을 고려해 FA 재계약 시 몸값까지 자진해서 낮췄던 이 감독이었기에 정신적 충격은 컸다. 배신감에 한때 은퇴까지 고민할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서장훈이 “(이)상민이형과 함께 뛰고 싶다”는 이유로 KCC행을 택했기에 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됐다. 당시 이 감독은 서장훈에게 “너와의 인연은 대학까지였던 것 같다”는 말을 남긴 채 서울행 짐을 쌌다.
그렇게 새 보금자리가 된 삼성에서 그는 마지막 투혼을 발휘했다. 2007~08, 2008~09시즌 팀을 챔피언결정전 준우승으로 이끌었지만, 끝내 우승의 꿈은 이
못하고 은퇴했다. KCC는 2010년 이 감독의 등번호 1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지만, 그는 구단이 마련한 은퇴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지도자 생활 역시 험난했다. 삼성에서 은퇴 후 코치를 거쳐 2014년 사령탑으로 데뷔, 8시즌 동안 장기 집권했지만 기대만큼 성과를 내지 못했다. 2016~17시즌 준우승이 최고 성적이었다. 이후 4시즌 연속 플레이오프(PO) 진출에 실패했다. 결국 통산 승률 0.399(160승 241패)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남긴 채 2022년 1월 시즌 도중 불명예 퇴진했다. 한때 농구 팬의 사랑을 독차지한 슈퍼스타는 ‘실패한 감독’이라는 꼬리표를 단 채 코트를 떠나 야인 생활을 시작했다.
KCC 복귀… 마지막 기회를 우승으로
농구계 안팎에서는 그가 다시 코트로 돌아오기 쉽지 않을 거란 시선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1년 반 가까이 코트에서 떠나 있는 동안 이 감독에게 마음의 빚이 있는 KCC가 그를 데려갈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현실이 됐다.
2023년 6월 KCC가 그를 코치로 불렀다. 가슴 한쪽에 남아 있던 응어리를 뒤로한 채 ‘절친’ 전창진 감독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선수단 주무 출신으로 명장 반열에 올라선 전 감독 곁에서 그는 선수단 운영을 하나하나 다시 배웠다.
복귀 첫 시즌부터 우승에 힘을 보탠 그는 2025년 5월 다시 한번 지휘봉을 잡았고, 정규리그 6위로 플레이오프(PO)에 턱걸이했다. 그러나 시즌 막판 부상 이탈했던 선수들이 모두 돌아오자 단기전에서 ‘슈퍼팀’의 진가가 드러났다. 6강 PO에서 원주 DB를 3연승으로 제압했고, 4강에선 정규리그 2위 안양 정관장을 3승 1패로 돌려세웠다. 그리고 챔프전에서 고양 소노의 돌풍마저 4승 1패로 꺾으며 정상에 올랐다.
농구 인생의 마지막 숙원이었던 ‘우승 감독’ 타이틀까지 달면서 이 감독은 프로농구 역사상 한 팀에서 선수·코치·감독으로 모두 우승한 최초의 지도자가 됐다. 이 감독은 “선수 때보다 챔프전을 준비하는 무게감이 훨씬 크게 다가왔다”면서 “선수로 우승한 것보다 지금이 훨씬 더 좋다”고 말했다.
이상민 KCC 감독이 10일 부산사직실내체육관에서 열린 2025~26시즌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4차전 고양 소노와 경기에서 작전 지시를 하고 있다. 뉴시스
‘토론 타임’ 리더십... 다음 목표는 통합 왕좌
2008~09시즌 서울 삼성 시절, 그는 작전 타임 장면으로 구설에 오른 적이 있다. 당시 안준호 삼성 감독이 "돼? 안 돼?"라고 묻자 ‘선수 이상민’이 "안 돼"라고 반말로 답하는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17년 뒤 '감독 이상민'의 입장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번 PO 기간 KCC 작전 타임에서 이 감독이 작전 지시를 하자, 선수
이 “숀(롱)이 이거 하는 게 낫지 않나?”라고 반대 의견을 내놨고, 이 감독은 머쓱한 웃음만 지었다. KCC의 작전 시간엔 정규리그와 플레이오프 내내 이렇게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 감독이 작전판을 내려놓는 대신, 선수들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면서 때로는 누가 감독이고, 선수인지 모를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일부에선 ‘작전 시간이 토론장 같다’, ‘감독이 선수들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나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개성 강한 선수들을 하나로 묶은 방식은 성공했다. 이 감독은 챔프전을 앞둔 미디어데이에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인과응보라고 누가 그러더라"라고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한 사람보단 여러 사람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의치 않는다. 모든 의견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소신을 밝혔다. 허훈 역시 “이렇게 개성 강한 선수들은 어떤 감독님이 와도 컨트롤하기 쉽지 않다. 잡으려고 하면 더 엇나갈 수 있다”며 “소통하고 배려하는 우리 감독님은 명장이 맞다”고 강조했다.
‘스타플레이어 출신은 성공한 지도자가 되기 어렵다’는 스포츠계의 오랜 속설에서 이 감독도 자유롭지 못했다. 특출했던 사람일수록 평범한 선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KCC에선 다른 방향을 바라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까지, 다른 팀에 가면 모두 에이스가 될 선수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뛰어난 기량과 인기를 겸비한 선수들을 수직적으로 통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 감독은 권위를 버리고 대화와 소통을 택했다. 스타의 심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슈퍼스타 출신 지도자였기에 가능한 접근이었다.
다만 이 감독은 자신의 리더십에 대한 과도한 포장을 경계했다. "우승하지 못했다면 스타 선수들에게 끌려간다는 비판을 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 말에는 냉정한 자기 인식이 담겨 있었다. 그는 이어 “나에겐 5명 모두가 MVP”라며 “개성 강한 선수들이 자신을 내려놓고 포지션별로 제 역할을 해줬기 때문에 지금의 성과가 있었다. 선수들에게 정말 고맙다”고 언급했다.
실패한 지도자로 끝날 뻔했던 이 감독의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음 목표는 통합 우승이다. 현대 시절 두 차례 통합 우승을 경험했지만, KCC 이름으로는 아직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을 동시에 제패한 적이 없다. KCC 사령탑에 오를 당시 "농구 인생 마지막 3년"이라며 배수의 진을 쳤던 이 감독이 써 내려갈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진다.
성환희 기자 hhsung@hankookilbo.com
“난 실패한 감독, 마지막이란 각오로 왔다.”
감독은 취임 자리에서 자신을 ‘실패한 감독’이라 표현했다. 스타 선수 출신 지도자가 입 밖에 꺼내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나 1년 뒤, 그는 정규리그 6위 팀을 이끌고 사상 첫 ‘6위의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일궈 냈다. 한국 농구사에서도 가장 극적인 드라마로 기억될 만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슈퍼스타가 추락의 끝에서 다시 일어나 가장 빛났던 자리로 돌아온 이야기다.
2007년 KCC 유니폼을 입고 마지막으로 뛸 당시의 이상민 감독. KCC 제공
'영원한 오빠' '산소 같은 남자' '컴퓨터 가드'. 이상민 감독은 설명이 필요 없는 자타공인 한국 농구의 아이콘이다. 농구인들은 강동희, 김승현 등을 제치고 역대 최고의 가드로 이 감독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연세대 농구부 시절, 그는
과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고, 프로 현대 시절엔 조니 맥도웰과의 픽앤롤로 ‘알고도 막지 못하는 공격’을 완성하며 리그를 지배했다. 이후 KCC에선 '이(상민)·조(성원)·추(승균)' 트리오의 한 축으로 전성기를 이끌었다.
경기를 조율하는 넓은 시야와 영리한 패스, 정확한 중거리 슛, 강력한 카리스마 등 포인트 가드의 덕목은 물론, 성실하고 반듯한 이미지까지 갖춰 '오빠 부대'를 몰고 다니며 화려한 인기를 누렸다.
연세대 시절부터 이 감독은 코트 위의 아이돌이었다. 그가 등장할 때마다 비명이 터졌고, 숙소 앞에는 밤마다 팬들이 몰려들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 속 주인공 (성)나정이가 죽고 못 사는 ‘상민이 오빠’가 바로 이상민 감독이었다. 이 감독은 1990년대 초중반 '농구대잔치 세대'를 대표하는 선수로 한국 농구의 르네상스를 주도했고, 연세대 재학 시절 '대학팀 최초의 농구대잔치 통합 우승'을 이끌었다.
현대와 그 후신인 KCC 유니폼을 입고 그는 13시즌간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 우승 각 3회, 정규리그 MVP 2회, 챔프전 MVP 1회 등 누구보다 화려한 선수 생활을 보냈다. 팬들의 사랑은 숫자로도 증명돼 프로농구 올스타 팬 투표가 시작된 2001~02시즌부터 2010년 은퇴할 때까지 단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준 적이 없다.
과 아시안게임 등 국제 무대를 누볐다. 특히 20년 만에 금메달을 획득한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필리핀과 준결승에서 경기 종료 직전 터뜨린 이 감독의 역전 3점 슛은 지금도 한국 농구 최고의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2008년 서울 삼성 시절 친정팀 KCC와 상대하고 있는 이상민 감독. 연합뉴스
충격의 삼성행... 좌절 뒤에 찾아온 기회
화려했던 선수 생활에도 그의 농구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2007년 그는 자유계약선수(FA) 서장훈의 보상선수로 서울 삼성으로 옮겼다. 삼성은 KCC의 전신인 현대 시절부터 재계와 스포츠를 대표하는 라이벌 구도였다. 그래서 KCC 간판스타인 이상민의 삼성 이적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줄곧 “KCC에서 은퇴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 왔고, 팀의 샐러리캡 부담을 고려해 FA 재계약 시 몸값까지 자진해서 낮췄던 이 감독이었기에 정신적 충격은 컸다. 배신감에 한때 은퇴까지 고민할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서장훈이 “(이)상민이형과 함께 뛰고 싶다”는 이유로 KCC행을 택했기에 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됐다. 당시 이 감독은 서장훈에게 “너와의 인연은 대학까지였던 것 같다”는 말을 남긴 채 서울행 짐을 쌌다.
그렇게 새 보금자리가 된 삼성에서 그는 마지막 투혼을 발휘했다. 2007~08, 2008~09시즌 팀을 챔피언결정전 준우승으로 이끌었지만, 끝내 우승의 꿈은 이
못하고 은퇴했다. KCC는 2010년 이 감독의 등번호 1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지만, 그는 구단이 마련한 은퇴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지도자 생활 역시 험난했다. 삼성에서 은퇴 후 코치를 거쳐 2014년 사령탑으로 데뷔, 8시즌 동안 장기 집권했지만 기대만큼 성과를 내지 못했다. 2016~17시즌 준우승이 최고 성적이었다. 이후 4시즌 연속 플레이오프(PO) 진출에 실패했다. 결국 통산 승률 0.399(160승 241패)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남긴 채 2022년 1월 시즌 도중 불명예 퇴진했다. 한때 농구 팬의 사랑을 독차지한 슈퍼스타는 ‘실패한 감독’이라는 꼬리표를 단 채 코트를 떠나 야인 생활을 시작했다.
KCC 복귀… 마지막 기회를 우승으로
농구계 안팎에서는 그가 다시 코트로 돌아오기 쉽지 않을 거란 시선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1년 반 가까이 코트에서 떠나 있는 동안 이 감독에게 마음의 빚이 있는 KCC가 그를 데려갈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현실이 됐다.
2023년 6월 KCC가 그를 코치로 불렀다. 가슴 한쪽에 남아 있던 응어리를 뒤로한 채 ‘절친’ 전창진 감독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선수단 주무 출신으로 명장 반열에 올라선 전 감독 곁에서 그는 선수단 운영을 하나하나 다시 배웠다.
복귀 첫 시즌부터 우승에 힘을 보탠 그는 2025년 5월 다시 한번 지휘봉을 잡았고, 정규리그 6위로 플레이오프(PO)에 턱걸이했다. 그러나 시즌 막판 부상 이탈했던 선수들이 모두 돌아오자 단기전에서 ‘슈퍼팀’의 진가가 드러났다. 6강 PO에서 원주 DB를 3연승으로 제압했고, 4강에선 정규리그 2위 안양 정관장을 3승 1패로 돌려세웠다. 그리고 챔프전에서 고양 소노의 돌풍마저 4승 1패로 꺾으며 정상에 올랐다.
농구 인생의 마지막 숙원이었던 ‘우승 감독’ 타이틀까지 달면서 이 감독은 프로농구 역사상 한 팀에서 선수·코치·감독으로 모두 우승한 최초의 지도자가 됐다. 이 감독은 “선수 때보다 챔프전을 준비하는 무게감이 훨씬 크게 다가왔다”면서 “선수로 우승한 것보다 지금이 훨씬 더 좋다”고 말했다.
이상민 KCC 감독이 10일 부산사직실내체육관에서 열린 2025~26시즌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4차전 고양 소노와 경기에서 작전 지시를 하고 있다. 뉴시스
‘토론 타임’ 리더십... 다음 목표는 통합 왕좌
2008~09시즌 서울 삼성 시절, 그는 작전 타임 장면으로 구설에 오른 적이 있다. 당시 안준호 삼성 감독이 "돼? 안 돼?"라고 묻자 ‘선수 이상민’이 "안 돼"라고 반말로 답하는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17년 뒤 '감독 이상민'의 입장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번 PO 기간 KCC 작전 타임에서 이 감독이 작전 지시를 하자, 선수
이 “숀(롱)이 이거 하는 게 낫지 않나?”라고 반대 의견을 내놨고, 이 감독은 머쓱한 웃음만 지었다. KCC의 작전 시간엔 정규리그와 플레이오프 내내 이렇게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 감독이 작전판을 내려놓는 대신, 선수들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면서 때로는 누가 감독이고, 선수인지 모를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일부에선 ‘작전 시간이 토론장 같다’, ‘감독이 선수들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나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개성 강한 선수들을 하나로 묶은 방식은 성공했다. 이 감독은 챔프전을 앞둔 미디어데이에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인과응보라고 누가 그러더라"라고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한 사람보단 여러 사람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의치 않는다. 모든 의견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소신을 밝혔다. 허훈 역시 “이렇게 개성 강한 선수들은 어떤 감독님이 와도 컨트롤하기 쉽지 않다. 잡으려고 하면 더 엇나갈 수 있다”며 “소통하고 배려하는 우리 감독님은 명장이 맞다”고 강조했다.
‘스타플레이어 출신은 성공한 지도자가 되기 어렵다’는 스포츠계의 오랜 속설에서 이 감독도 자유롭지 못했다. 특출했던 사람일수록 평범한 선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KCC에선 다른 방향을 바라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까지, 다른 팀에 가면 모두 에이스가 될 선수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뛰어난 기량과 인기를 겸비한 선수들을 수직적으로 통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 감독은 권위를 버리고 대화와 소통을 택했다. 스타의 심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슈퍼스타 출신 지도자였기에 가능한 접근이었다.
다만 이 감독은 자신의 리더십에 대한 과도한 포장을 경계했다. "우승하지 못했다면 스타 선수들에게 끌려간다는 비판을 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 말에는 냉정한 자기 인식이 담겨 있었다. 그는 이어 “나에겐 5명 모두가 MVP”라며 “개성 강한 선수들이 자신을 내려놓고 포지션별로 제 역할을 해줬기 때문에 지금의 성과가 있었다. 선수들에게 정말 고맙다”고 언급했다.
실패한 지도자로 끝날 뻔했던 이 감독의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음 목표는 통합 우승이다. 현대 시절 두 차례 통합 우승을 경험했지만, KCC 이름으로는 아직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을 동시에 제패한 적이 없다. KCC 사령탑에 오를 당시 "농구 인생 마지막 3년"이라며 배수의 진을 쳤던 이 감독이 써 내려갈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진다.
성환희 기자 hhs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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