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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사회의 길을 묻다] 이주민은 타인이 아니다: 대한민국 이주 정책...
2026. 07. 06. 오전 12:16
1[불교, 사회의 길을 묻다] 이주민은 타인이 아니다: 대한민국 이주 정책의 불편한 진실과 불교적 실천
대한민국에는 매년 다문화·다민족 축제가 곳곳에서 열린다. 2005년부터 시작돼 정부와 지자체가 주관하는 ‘세계인의 날 기념식’ 및 각종 다문화 행사를 비롯해, 매년 수십만 명이 찾는 국내 최대 규모의 이주민·다문화 축제 ‘MAMF(창원)’, 연합뉴스와 우리금융 그룹이 주최하는 ‘대한민국 다문화 페스타(서울)’, 인천 ‘부평 다함께 어울림 축제’, 안산 ‘국제거리극 축제’와 ‘세계인의 날 축제’ 등. 이러한 다문화 축제들은 전통 의상을 입은 이주민들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춤을 추고, 내국인들은 박수를 보내며 한국 사회의 따뜻한 관용과 ‘다문화’적 포용력을 자축하는 장으로 소비된다.
그 시각, 전국 곳곳의 중소 제조업 공장들과 농촌 단지 등에서 수많은 이주노동자는 쉴 권리 없이 메케한 분진과 기계 소음 속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 그들의 손발을 묶고 있는 것은 정부의 고용허가제와 ‘사업장 변경 제한’이라는 법적 사슬이다. 고용주의 부당한 폭언이나 임금 체불, 생명을 위협하는 열악한 환경을 마주해도 이주노동자는 사장의 동의 없이 일터를 옮길 수 없다. 또한 축제를 즐기면서도 이주민의 고유한 문화와 정체성은 인정하지 않고 오직 “한국 사람처럼 살라”는 일방적 동화주의(同化主義, Cultural Assimilation)의 압박이 상존한다.
우리는 이주민을 향해 ‘관용’과 ‘글로벌’을 외치지만, 동시에 철저한 법적 배제와 도구화를 당연시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마주한 이주민 문제의 기묘하고도 이중적인 풍경이다. 사회학자 손인서는 저서 『다민족 사회 대한민국』(돌베개, 2024)에서 한국 사회의 이주민 차별과 혐오 문제를 ‘개인의 무지’나 ‘문화적 미숙함’ 탓으로 돌리던 기존의 온정주의적 담론을 비판한다. 차별과 혐오가 국가의 법과 제도, 그리고 자본의 결탁이 정밀하게 설계해 낸 ‘구조적 생산물’이라는 그의 주장을 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는 이미 명실상부한 다문화·다민족 사회에 진입했다. 2025년 말 기준 국내 체류 외국인은 278만 3,247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 5%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이주민들은 제조업과 농축산업, 건설업, 돌봄 노동, 서비스업 등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가장 기초적인 영역을 지탱하는 핵심축이다. 이미 농촌 지역에서는 결혼이주여성이 지역 사회의 소멸을 막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중심 구성원이 됐다. 산업 현장에서는 이주노동자가 없으면 공장 가동이 어렵고, 농촌에서는 수확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오래전부터 고착화됐다.
그러나 이처럼 거대하게 변해 버린 인구 구조와 경제적 의존도에 비해, 우리의 인식과 제도는 이주민을 함께 삶을 엮어 가는 ‘이웃’이나 ‘동료 시민’으로 바라보기보다, 필요할 때 일시적으로 쓰고 버리는 ‘노동력’ 혹은 치안을 위해 통제해야 할 ‘관리의 대상’으로만 소비한다. 경제적 필요에 의해 그들의 손과 발은 간절히 요구하면서도, 사회적 권리와 인간적 존엄의 문제 앞에서는 철저히 배제하는 이 모순된 태도가 오늘날 한국 이주 정책의 민낯이다.
노동력은 필요하지만 이주노동자는 환영받지 못하는 모순
현재 한국의 이주 정책은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와 경제적 필요에 따라 형성되고 조절돼 왔다. 3D 업종으로 불리는 중소 제조업, 농어업, 건설 현장 등은 이주노동자의 땀방울이 없으면 한순간도 유지될 수 없다.
이처럼 중요하게 기여하고 있지만, 이주노동자들이 돌려받는 대가는 참혹하다. 2020년 12월, 한파 특보가 내려진 겨울날, 경기도 포천의 한 농장 비닐하우스 내 조립식 패널 숙소에서 캄보디아 출신 노동자 속헹 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난방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방에서 추위를 견디다 고독하게 숨진 속헹 씨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이주민을 어떻게 대우하는지를 보여 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주노동자가 희생된 역대 최악의 비극은 2024년 6월 24일 발생한 경기도 화성 리튬전지 제조 공장(아리셀) 화재 참사다. 이 사고로 목숨을 잃은 23명의 노동자 중 무려 18명이 중국과 라오스 등에서 온 이주노동자였다. 사외 파견업체를 통한 불법 파견 의혹,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대피로 안내 및 안전 교육 미비 등이 겹치며 발생한 이 인재는 대한민국이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고 자축하는 이 순간에도, 이주민의 목숨을 얼마나 값싸고 소모적인 부품으로 여겨 왔는지를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이러한 비극을 법적·구조적으로 강제하는 핵심 고리가 바로 ‘고용허가제’다. 이 제도는 이주노동자에게 ‘사업장 이동의 자유’를 원칙적으로 금지한다. 일터에서 폭언, 폭행, 임금 체불, 혹은 속헹 씨의 경우처럼 생명을 위협하는 주거 환경을 마주하더라도, 고용주가 동의서에 도장을 찍어 주지 않으면 합법적으로 직장을 옮길 수 없다. 동의 없이 일터를 이탈하는 순간 그들은 즉시 ‘불법체류자(미등록 이주민)’라는 범죄자 낙인이 찍혀 추방 위기에 처한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시민단체들이 이 제도를 두고 “사실상의 강제노동 구조”라고 반복해서 지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정과 교육의 영역에서도 양태를 바꿔 가며 차별이 반복된다. 결혼이주여성들은 언어 장벽과 문화적 차이, 가정 내 폭력과 경제적 통제, 그리고 사회적 고립이라는 다중고를 겪고 있다.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전국에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설치됐으나, 여전히 시혜적 차원의 복지에 머물러 있어 실효성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다문화 가정의 자녀와 학생 수는 매년 꾸준히 증가하지만, 이들이 학교 생활에서 겪는 은밀한 차별과 폭력, 그로 인한 학업 중단과 소외 문제는 한국 사회의 심각한 그늘로 자라나고 있다.
‘인종기획’과 관리 중심 정책의 한계
손인서는 이처럼 출신국과 직업에 따라 이주민을 분류하고 차별적으로 수용하는 한국의 이민 행정을 ‘인종기획(Racial Project)’ 이라는 관점에서 해부한다. 인종주의는 생물학적 차이나 개인의 무지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라, 기득권이 자신들의 경제적·정치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법과 제도로 인간의 등급을 매기고 배제하는 고도의 사회적 공정이라는 뜻이다. 서구권 출신의 백인 지식인이나 전문직 종사자는 ‘글로벌 인재’로 환대하며 영주권을 비교적 쉽게 허용하는 반면, 개발도상국 출신의 육체노동자나 중국 교포(조선족)는 철저히 감시하고 통제해야 할 하층 계급으로 분류한다.
정부가 시행하는 대다수의 다문화 정책은 주로 한국어 교육과 생활 적응 지원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초기 정착을 위해 필요한 일이지만, 문제는 그 기본 관점이 상호 존중이 아닌 일방적인 ‘동화’라는 점에 있다. 특히 법무부의 사회통합프로그램(KIIP)처럼, 교육 대부분은 이주민에게 “한국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는 관점을 바탕으로 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오직 주류 질서에 얼마나 순응하는가만이 평가 기준이 되는 동화주의는 소수자가 다수 문화에 일방적으로 무릎 꿇기를 요구하는 문화적 폭력이다. 최근 정부가 저출생과 돌봄 공백의 해법이라며 도입한 ‘외국인 가사관리사(필리핀 가사도우미) 제도’ 역시 가사 노동의 가치를 저평가하고 저임금 이주 여성의 노동력으로 임시방편식 땜질을 하겠다는 도구적 발상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사회적 복지 시스템의 근본적 개선 없이 취약한 처지의 이주 여성을 수입해 위기를 모면하려 한다. 이는 또 다른 형태의 착취 구조를 국내에 새롭게 이식할 뿐이다.
불교는 왜 이주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이주민 문제를 경제나 복지 정책의 범주로만 제한해 바라보는 시선이 많다. 그러나 불교의 관점에서 이 문제는 단순한 사회 정책의 파편이 아니다. 우리의 탐·진·치를 걷어 내는 마음 수행이자 자비의 실천이며, 연기적 공동체를 회복하는 시급한 종교적 과제다.
이주민을 마주할 때 국적과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거리감을 두거나 일자리를 위협하는 경쟁자로 바라보기 쉽다. 이러한 분별심이야말로 아상(我相)에 갇힌 무명(無明)의 산물이다. 이주민 문제는 ‘나는 왜 저 사람을 낯선 타인으로 보는가?’라는 근본적인 수행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일상은 이주민들의 노동과 촘촘히 엮여 있다. 먹거리, 거주하는 건물, 돌봄의 손길 모두 그들의 피와 땀에 빚지고 있다. 내국인은 수많은 이주민을 조건으로 하여 비로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국적이나 민족은 고정불변한 실체가 아니다. 인류는 끊임없이 이동해 왔고, ‘한국인’이라는 정체성 역시 조건에 따라 형성된 가설일 뿐이다. 실체 없는 국적을 내세워 타인을 차별하는 것은 허상을 붙잡고 고통을 자초하는 전도몽상(顚倒夢想)이다.
따라서 이주민 문제에 동참하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구현이자 현대적 보살행이다. 법적 사슬에 묶여 신음하는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손을 잡아 주는 것이 우리 안의 차별심을 걷어 내는 마음 수행이자, 사회적 수행이다.
다문화 시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위한 사회적 수행
그렇다면 불교계는 교단의 차원에서 무엇을 지원해야 할까?
첫째, 붓다 재세 당시 사찰은 교육과 의료, 구휼과 공동체 돌봄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듯이, 사찰을 지역 다문화 공동체의 열린 거점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사찰의 공간을 활용해 체계적인 한국어 교육 제공, 노무·법률 등 상담 프로그램 상설화, 공동 식사, 공동 텃밭,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명상 프로그램 등을 통해 시혜와 수혜의 관계를 넘어 평등한 이웃으로서 관계를 형성하는 따뜻한 장을 제공해야 한다.
둘째, 불교계 차원의 통합적 이주민 지원 네트워크도 필요하다. 현재 개별 사찰이나 소수의 불교시민단체 차원에서 진행되는 이주민 지원 사업을 종단적 차원에서 묶어 내는 거대한 연대망이 요구된다. 법률 상담, 노동권 보호, 의료 지원, 심리 치료 등을 전문 체계와 연계해 원스톱으로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통해 이주노동자가 임금 체불이나 산재를 당했을 때 즉각적으로 법적·의료적 구제를 받을 수 있는 안전망을 제공해 준다.
셋째, 이주민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 마련과 사업을 전개해야 한다. 그동안의 이주 정책은 내국인들이 일방적으로 시혜를 베풀고 이주민은 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구조였다. 이제는 이주민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직접 내고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장을 만들어 주는 것도 중요하다. 불교계는 지방자치단체의 각종 위원회나 지역의 공론장에 이주민 대표들이 결합할 수 있도록 지원하며, 이주 아동과 다문화 청소년들에 대한 장학 사업과 진로 멘토링을 강화하고, 학교 현장에서 발생하는 은밀한 혐오와 차별을 방지하기 위해 다문화 감수성 교육을 체계화하는 일에도 앞장서야 한다.
넷째, 사회적 차별과 혐오에 맞서 차별금지법 제정에 앞장서야 한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주민 혐오와 인종주의에 대해서도 종교적 양심을 걸고 단호히 저항해야 한다. 대구 이슬람 사원 건축 갈등처럼 이주민의 정당한 권리가 혐오 세력에 의해 짓밟힐 때, 공권력과 지자체가 표를 의식해 방관할 때, 불교계는 부처님의 파사현정(破邪顯正) 정신으로 그 자리에 함께 서서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수호해야 한다.
다문화 시대의 불교는 묻고 있다. “우리는 누구와 함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리고 그 답은 우리가 사는 인드라망의 세계 속에 펼쳐져 있다. 우리는 처음부터 서로 연결돼 있었고, 앞으로도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신대승네트워크 협업미래센터 소장, 청소년희망플랫폼 대표. 생명평화사회를 추구하는 생활수행공동체 신대승네트워크에서 ‘지구시민보살’로 붓다의 가르침을 참여·생명·생활·이타행 불교로 풀어 시대와 사회가 빚어내는 고통을 해결하고자 한다. 모든 존재의 차별과 소외가 없는 생명평화사회를 위해 불교와 사회를 연결하고, 불자와 시민을 연결하고, 욕구를 원력으로 전환시키는 길을 꾸준히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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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초대석] "불교의 비판 정신이 드러난 책"- 『나가르주나의 중도-근본중송』 번역한 금강대학교 김성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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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전국 곳곳의 중소 제조업 공장들과 농촌 단지 등에서 수많은 이주노동자는 쉴 권리 없이 메케한 분진과 기계 소음 속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 그들의 손발을 묶고 있는 것은 정부의 고용허가제와 ‘사업장 변경 제한’이라는 법적 사슬이다. 고용주의 부당한 폭언이나 임금 체불, 생명을 위협하는 열악한 환경을 마주해도 이주노동자는 사장의 동의 없이 일터를 옮길 수 없다. 또한 축제를 즐기면서도 이주민의 고유한 문화와 정체성은 인정하지 않고 오직 “한국 사람처럼 살라”는 일방적 동화주의(同化主義, Cultural Assimilation)의 압박이 상존한다.
우리는 이주민을 향해 ‘관용’과 ‘글로벌’을 외치지만, 동시에 철저한 법적 배제와 도구화를 당연시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마주한 이주민 문제의 기묘하고도 이중적인 풍경이다. 사회학자 손인서는 저서 『다민족 사회 대한민국』(돌베개, 2024)에서 한국 사회의 이주민 차별과 혐오 문제를 ‘개인의 무지’나 ‘문화적 미숙함’ 탓으로 돌리던 기존의 온정주의적 담론을 비판한다. 차별과 혐오가 국가의 법과 제도, 그리고 자본의 결탁이 정밀하게 설계해 낸 ‘구조적 생산물’이라는 그의 주장을 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는 이미 명실상부한 다문화·다민족 사회에 진입했다. 2025년 말 기준 국내 체류 외국인은 278만 3,247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 5%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이주민들은 제조업과 농축산업, 건설업, 돌봄 노동, 서비스업 등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가장 기초적인 영역을 지탱하는 핵심축이다. 이미 농촌 지역에서는 결혼이주여성이 지역 사회의 소멸을 막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중심 구성원이 됐다. 산업 현장에서는 이주노동자가 없으면 공장 가동이 어렵고, 농촌에서는 수확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오래전부터 고착화됐다.
그러나 이처럼 거대하게 변해 버린 인구 구조와 경제적 의존도에 비해, 우리의 인식과 제도는 이주민을 함께 삶을 엮어 가는 ‘이웃’이나 ‘동료 시민’으로 바라보기보다, 필요할 때 일시적으로 쓰고 버리는 ‘노동력’ 혹은 치안을 위해 통제해야 할 ‘관리의 대상’으로만 소비한다. 경제적 필요에 의해 그들의 손과 발은 간절히 요구하면서도, 사회적 권리와 인간적 존엄의 문제 앞에서는 철저히 배제하는 이 모순된 태도가 오늘날 한국 이주 정책의 민낯이다.
노동력은 필요하지만 이주노동자는 환영받지 못하는 모순
현재 한국의 이주 정책은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와 경제적 필요에 따라 형성되고 조절돼 왔다. 3D 업종으로 불리는 중소 제조업, 농어업, 건설 현장 등은 이주노동자의 땀방울이 없으면 한순간도 유지될 수 없다.
이처럼 중요하게 기여하고 있지만, 이주노동자들이 돌려받는 대가는 참혹하다. 2020년 12월, 한파 특보가 내려진 겨울날, 경기도 포천의 한 농장 비닐하우스 내 조립식 패널 숙소에서 캄보디아 출신 노동자 속헹 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난방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방에서 추위를 견디다 고독하게 숨진 속헹 씨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이주민을 어떻게 대우하는지를 보여 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주노동자가 희생된 역대 최악의 비극은 2024년 6월 24일 발생한 경기도 화성 리튬전지 제조 공장(아리셀) 화재 참사다. 이 사고로 목숨을 잃은 23명의 노동자 중 무려 18명이 중국과 라오스 등에서 온 이주노동자였다. 사외 파견업체를 통한 불법 파견 의혹,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대피로 안내 및 안전 교육 미비 등이 겹치며 발생한 이 인재는 대한민국이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고 자축하는 이 순간에도, 이주민의 목숨을 얼마나 값싸고 소모적인 부품으로 여겨 왔는지를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이러한 비극을 법적·구조적으로 강제하는 핵심 고리가 바로 ‘고용허가제’다. 이 제도는 이주노동자에게 ‘사업장 이동의 자유’를 원칙적으로 금지한다. 일터에서 폭언, 폭행, 임금 체불, 혹은 속헹 씨의 경우처럼 생명을 위협하는 주거 환경을 마주하더라도, 고용주가 동의서에 도장을 찍어 주지 않으면 합법적으로 직장을 옮길 수 없다. 동의 없이 일터를 이탈하는 순간 그들은 즉시 ‘불법체류자(미등록 이주민)’라는 범죄자 낙인이 찍혀 추방 위기에 처한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시민단체들이 이 제도를 두고 “사실상의 강제노동 구조”라고 반복해서 지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정과 교육의 영역에서도 양태를 바꿔 가며 차별이 반복된다. 결혼이주여성들은 언어 장벽과 문화적 차이, 가정 내 폭력과 경제적 통제, 그리고 사회적 고립이라는 다중고를 겪고 있다.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전국에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설치됐으나, 여전히 시혜적 차원의 복지에 머물러 있어 실효성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다문화 가정의 자녀와 학생 수는 매년 꾸준히 증가하지만, 이들이 학교 생활에서 겪는 은밀한 차별과 폭력, 그로 인한 학업 중단과 소외 문제는 한국 사회의 심각한 그늘로 자라나고 있다.
‘인종기획’과 관리 중심 정책의 한계
손인서는 이처럼 출신국과 직업에 따라 이주민을 분류하고 차별적으로 수용하는 한국의 이민 행정을 ‘인종기획(Racial Project)’ 이라는 관점에서 해부한다. 인종주의는 생물학적 차이나 개인의 무지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라, 기득권이 자신들의 경제적·정치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법과 제도로 인간의 등급을 매기고 배제하는 고도의 사회적 공정이라는 뜻이다. 서구권 출신의 백인 지식인이나 전문직 종사자는 ‘글로벌 인재’로 환대하며 영주권을 비교적 쉽게 허용하는 반면, 개발도상국 출신의 육체노동자나 중국 교포(조선족)는 철저히 감시하고 통제해야 할 하층 계급으로 분류한다.
정부가 시행하는 대다수의 다문화 정책은 주로 한국어 교육과 생활 적응 지원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초기 정착을 위해 필요한 일이지만, 문제는 그 기본 관점이 상호 존중이 아닌 일방적인 ‘동화’라는 점에 있다. 특히 법무부의 사회통합프로그램(KIIP)처럼, 교육 대부분은 이주민에게 “한국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는 관점을 바탕으로 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오직 주류 질서에 얼마나 순응하는가만이 평가 기준이 되는 동화주의는 소수자가 다수 문화에 일방적으로 무릎 꿇기를 요구하는 문화적 폭력이다. 최근 정부가 저출생과 돌봄 공백의 해법이라며 도입한 ‘외국인 가사관리사(필리핀 가사도우미) 제도’ 역시 가사 노동의 가치를 저평가하고 저임금 이주 여성의 노동력으로 임시방편식 땜질을 하겠다는 도구적 발상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사회적 복지 시스템의 근본적 개선 없이 취약한 처지의 이주 여성을 수입해 위기를 모면하려 한다. 이는 또 다른 형태의 착취 구조를 국내에 새롭게 이식할 뿐이다.
불교는 왜 이주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이주민 문제를 경제나 복지 정책의 범주로만 제한해 바라보는 시선이 많다. 그러나 불교의 관점에서 이 문제는 단순한 사회 정책의 파편이 아니다. 우리의 탐·진·치를 걷어 내는 마음 수행이자 자비의 실천이며, 연기적 공동체를 회복하는 시급한 종교적 과제다.
이주민을 마주할 때 국적과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거리감을 두거나 일자리를 위협하는 경쟁자로 바라보기 쉽다. 이러한 분별심이야말로 아상(我相)에 갇힌 무명(無明)의 산물이다. 이주민 문제는 ‘나는 왜 저 사람을 낯선 타인으로 보는가?’라는 근본적인 수행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일상은 이주민들의 노동과 촘촘히 엮여 있다. 먹거리, 거주하는 건물, 돌봄의 손길 모두 그들의 피와 땀에 빚지고 있다. 내국인은 수많은 이주민을 조건으로 하여 비로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국적이나 민족은 고정불변한 실체가 아니다. 인류는 끊임없이 이동해 왔고, ‘한국인’이라는 정체성 역시 조건에 따라 형성된 가설일 뿐이다. 실체 없는 국적을 내세워 타인을 차별하는 것은 허상을 붙잡고 고통을 자초하는 전도몽상(顚倒夢想)이다.
따라서 이주민 문제에 동참하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구현이자 현대적 보살행이다. 법적 사슬에 묶여 신음하는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손을 잡아 주는 것이 우리 안의 차별심을 걷어 내는 마음 수행이자, 사회적 수행이다.
다문화 시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위한 사회적 수행
그렇다면 불교계는 교단의 차원에서 무엇을 지원해야 할까?
첫째, 붓다 재세 당시 사찰은 교육과 의료, 구휼과 공동체 돌봄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듯이, 사찰을 지역 다문화 공동체의 열린 거점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사찰의 공간을 활용해 체계적인 한국어 교육 제공, 노무·법률 등 상담 프로그램 상설화, 공동 식사, 공동 텃밭,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명상 프로그램 등을 통해 시혜와 수혜의 관계를 넘어 평등한 이웃으로서 관계를 형성하는 따뜻한 장을 제공해야 한다.
둘째, 불교계 차원의 통합적 이주민 지원 네트워크도 필요하다. 현재 개별 사찰이나 소수의 불교시민단체 차원에서 진행되는 이주민 지원 사업을 종단적 차원에서 묶어 내는 거대한 연대망이 요구된다. 법률 상담, 노동권 보호, 의료 지원, 심리 치료 등을 전문 체계와 연계해 원스톱으로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통해 이주노동자가 임금 체불이나 산재를 당했을 때 즉각적으로 법적·의료적 구제를 받을 수 있는 안전망을 제공해 준다.
셋째, 이주민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 마련과 사업을 전개해야 한다. 그동안의 이주 정책은 내국인들이 일방적으로 시혜를 베풀고 이주민은 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구조였다. 이제는 이주민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직접 내고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장을 만들어 주는 것도 중요하다. 불교계는 지방자치단체의 각종 위원회나 지역의 공론장에 이주민 대표들이 결합할 수 있도록 지원하며, 이주 아동과 다문화 청소년들에 대한 장학 사업과 진로 멘토링을 강화하고, 학교 현장에서 발생하는 은밀한 혐오와 차별을 방지하기 위해 다문화 감수성 교육을 체계화하는 일에도 앞장서야 한다.
넷째, 사회적 차별과 혐오에 맞서 차별금지법 제정에 앞장서야 한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주민 혐오와 인종주의에 대해서도 종교적 양심을 걸고 단호히 저항해야 한다. 대구 이슬람 사원 건축 갈등처럼 이주민의 정당한 권리가 혐오 세력에 의해 짓밟힐 때, 공권력과 지자체가 표를 의식해 방관할 때, 불교계는 부처님의 파사현정(破邪顯正) 정신으로 그 자리에 함께 서서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수호해야 한다.
다문화 시대의 불교는 묻고 있다. “우리는 누구와 함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리고 그 답은 우리가 사는 인드라망의 세계 속에 펼쳐져 있다. 우리는 처음부터 서로 연결돼 있었고, 앞으로도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신대승네트워크 협업미래센터 소장, 청소년희망플랫폼 대표. 생명평화사회를 추구하는 생활수행공동체 신대승네트워크에서 ‘지구시민보살’로 붓다의 가르침을 참여·생명·생활·이타행 불교로 풀어 시대와 사회가 빚어내는 고통을 해결하고자 한다. 모든 존재의 차별과 소외가 없는 생명평화사회를 위해 불교와 사회를 연결하고, 불자와 시민을 연결하고, 욕구를 원력으로 전환시키는 길을 꾸준히 걷고 있다.
동자, 동심童心과 불심佛心을 공양하다
월간불광 621호 2026년 7월호 공양하는 아이들 동자
[불광초대석] "불교의 비판 정신이 드러난 책"- 『나가르주나의 중도-근본중송』 번역한 금강대학교 김성철 교수
[불광서재] 근본중송 나가르주나의 중도 외
5년간의 미국 수행기 ⑲ 미국 위산사의 점심 시간
[기도로 일군 도솔산 내원정사] 남방불교의 정수(精髓), 위빠사나 템플스테이 - 내원정사 선원장 지철 스님
우리 스님 석전 박한영 ⑪ 스님의 건강과 눈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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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문화이야기] 경북 영양과 서석지(瑞石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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