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리핀 교민 쇼핑 필수 코스
쇼피(Shopee) 오늘만 이 가격, 타임세일 즉시 확인!
할인받기 〉
local
[노정태의 개념 상실의 시대] 정치에 눈이 먼 어른들아, 철학이 어렵다...
2026. 06. 25. 오전 01:13
50
‘은혜 갚은 까치‘가 인간에 준 교훈
철학자 흄 “감사 망각은 끔찍한 죄”
생각이 잘못되면 행동도 잘못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우리가 ‘개념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 어렵게만 느껴지는 철학과 인문학의 개념들을 이해하면서 우리의 현실을 진단해 본다.
‘감사의 정원’은 밤에 가야 진가를 볼 수 있다. 6.25m 높이의 돌기둥 23개는 6·25에 참전한 유엔군 22국과 한국을 상징한다. 오후 8시에 하늘로 빛을 쏘아 올린다. 시민들은 이 조형물을 의자 삼아 앉아서 이야기를 나눈다. /오종찬 기자
나그네 선비가 까치 둥지를 습격하는 구렁이를 쏘아 죽였다. 산속에서 길을 잃은 선비는 암컷 구렁이의 술수에 홀려 사람 없는 빈 암자에 붙들리게 되었고, 암구렁이는 언덕 위 종루에 있는 종이 세 번 울리면 살려주겠다고 한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신을 위해 종을 울려줄 자 누구인가. 절망에 빠진 선비가 체념할 즈음 갑자기 종소리가 들려온다. 구렁이가 물러나고 아침이 밝아 종루에 가보니 그곳에는 어제 구한 새끼 까치의 어미새들이 죽어 있었다. 나그네 선비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며 종을 울린 것이다. 전래동화 ‘은혜 갚은 까치’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분명하다. 남이 내게 베풀어준 호의에 감사할 줄 아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덕목이다. ‘짐승마저도 은혜를 갚는다’는 식으로 그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은혜 갚은 까치’가 있다면 이솝 우화에는 ‘사자와 생쥐’가 있고, 일본에는 ‘학의 보은’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교훈의 취지는 대동소이하다. 남이 내게 호의를 베풀어준다면 당연하게 여기지 말 것. 특히 그 도움이 크고 중요한 것이었다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은혜를 갚을 것. 은혜를 모르는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하지 말 것.
감사(Gratitude)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버드대학 연구팀이 평균 나이 79세 미국 여성 4만9275명을 대상으로 수행하여 2024년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일상생활에서 늘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사망률이 29%나 낮았다고 한다. 사회적 차원에서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서로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조직이나 집단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철학자들이 감사를 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 전까지는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였을까? 전지전능한 신이 존재하는가, 이 우주가 영원한 곳인가, 아니면 우리의 도덕적 삶은 어떤 이성적 근거 위에서 가능한가, 같은 거창한 주제를 다루는 것만 해도 벅찰 지경이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아무튼 1981년 영국 헐(Hull) 대학의 A. D. M. 워커가 ‘감사함과 감사’(Gratefulness and Gratitude)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감사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우리는 2012년 위스콘신 대학의 션 매컬리어가 발표한 논문 ‘명제적 감사’(Propositional Gratitude)와 후속 논의들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
오늘날 철학자들은 감사를 크게 둘로 나눈다. 첫째, “하느님 감사합니다, 오늘이 금요일이네요”라든가, “건강하게 살아 있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같은 ‘명제적 감사’가 있다. 특정 인물이 아니라 좋은 상태나 사건을 두고 긍정적 감정을 느끼고 표출하는 것이다. 이는 기쁨이나 안도에 더 가까울 수 있다.
그러므로 철학자들은 두 번째 유형의 감사, 즉 ‘전치사적 감사’(prepositional gratitude)에 주목한다. 전치사적 감사란 ‘...에게’라는 뜻을 지니는 전치사 ‘to’를 포함하는 감사다. “그 사람이 나를 도와줘서 감사하다”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여기에는 수혜자(Y), 은혜를 베푼 사람(R), 그 사람이 한 행위(φ)가 포함되어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인격적(personal) 감사’라 할 수 있겠다.
2016년 6월 23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서울시 추죄 6.25전쟁 제76주년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고운호 기자
은혜 갚은 까치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나그네 선비는 구렁이를 쏘아 죽였다. 그 구체적인 행위로 인해 까치 부부는 수혜자가 되었고 선비는 은혜를 베푼 사람이 되었다. 까치 부부는 선비에게 인격적 감사를 표하기 위해, 그날 밤 수혜자에서 은혜를 베푸는 주체가 되었다. 손발이 묶인 채 붙들려 있는 선비를 위해 머리가 깨지도록 종을 들이받아 그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이 등장한다. 선비는 까치 새끼들의 목숨을 구했다. 자식은 목숨만큼, 아니 목숨보다 더 소중한 존재이니 까치 부부가 죽음을 무릅쓰고 종을 친 것은 당연한 일 같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활 잘 쏘는 선비에게 구렁이를 쏘아 죽이는 것은 그리 어렵거나 본인을 큰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면 작은 까치가 온 산에 울리도록 종을 치려면 머리가 깨지고 목이 부러지도록 종에 몸을 부딪쳐야 한다. 선비는 작은 호의를 베풀었지만, 까치 부부는 모든 것을 희생하며 되갚았다는 이야기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인격적 감사에 수반되는 구체적 행위는 대칭적이지 않다. 고마운 마음과 은혜를 서로 똑같이 1:1로 주고받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마치 구렁이를 쏘아 죽이는 일과 종을 울리는 일의 위험도가 같지 않았던 것과 같다. 감사할 일은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 속에서 벌어지며, 수혜자와 은혜를 베푼 사람의 관계 역시 많은 경우 동등하지 않은 것이다.
철학적 논점들이 쏟아져 나오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현실 세계에는 군인이나 경찰, 소방관처럼 타인을 위해 때로는 목숨까지 바쳐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희생과 헌신도 감사의 대상일까? 그들은 그저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을 뿐이니, 다시 말해 자발적인 행위의 주체가 아니니, 따로 감사를 표할 필요가 없는 걸까?
개전 한 달도 안 된 1950년 7월 20일, 인공기를 앞세우고 대전 시내로 진주해 들어오는 북한군 제3사단. /청미디어
가장 가깝고 직접적인 사례를 들어보자.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생사의 기로에 놓였다. 북한의 기습 남침에 맞설 힘이 없었지만 약 한 달간 전열을 유지하며 후퇴하여 낙동강에 최후 방어선을 쳤다. 신생 국가 대한민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위기였다. 까치 둥지를 향해 구렁이가 달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은 전래동화와 달랐다. 소련과 중국을 등에 업은 북한은 유엔군을 지독하게 물고 늘어졌다. 미국은 178만명이 참전해 3만6574명의 전사자를 냈고, 영국은 1078명의 자국 청년들의 생명을 바쳤다. 튀르키예,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그리스, 태국, 네덜란드,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벨기에, 필리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뉴질랜드는 모두 수백에서 수십 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냈다.
상식적인 보통 사람의 윤리적 직관이 향하는 결론은 분명하다. 이것은 감사를 표해야 마땅한 일이다. 지구 반대편, 어딘지도 모르는 나라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싸운 이들에게 고마움을 표하지 않는다면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기준마저 버리는 일이다. 지난 5월 서울 광화문광장에 개장한 ‘감사의 정원’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이 전반적으로 우호적이었던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평화를 상징해야 할 광화문광장에 ‘받들어 총’을 모티프로 한 기념물이 들어서서는 안 된다는 둥, 용산 전쟁기념관에나 설치되었어야 한다는 둥, 온갖 볼멘소리가 불거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유엔군은 그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니 고마워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복잡한 심정이 들기도 했다. 철학자의 사고실험에나 나올 이야기가 공론장에서 버젓이 오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대단한 철학적 논의가 필요한 일조차 아니다.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 말했듯, 감사의 마음을 잊는 것은 “인류가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죄악 중 가장 끔찍하고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정치에 눈이 멀어 개념을 상실한 어른들에게, 철학이 너무 어렵다면 전래동화라도 읽어볼 것을 권한다.
2022년 11월 11일 부산 UN기념공원에서 열린 UN참전용사 국제추모식. /김동환 기자
철학자 흄 “감사 망각은 끔찍한 죄”
생각이 잘못되면 행동도 잘못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우리가 ‘개념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 어렵게만 느껴지는 철학과 인문학의 개념들을 이해하면서 우리의 현실을 진단해 본다.
‘감사의 정원’은 밤에 가야 진가를 볼 수 있다. 6.25m 높이의 돌기둥 23개는 6·25에 참전한 유엔군 22국과 한국을 상징한다. 오후 8시에 하늘로 빛을 쏘아 올린다. 시민들은 이 조형물을 의자 삼아 앉아서 이야기를 나눈다. /오종찬 기자
나그네 선비가 까치 둥지를 습격하는 구렁이를 쏘아 죽였다. 산속에서 길을 잃은 선비는 암컷 구렁이의 술수에 홀려 사람 없는 빈 암자에 붙들리게 되었고, 암구렁이는 언덕 위 종루에 있는 종이 세 번 울리면 살려주겠다고 한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신을 위해 종을 울려줄 자 누구인가. 절망에 빠진 선비가 체념할 즈음 갑자기 종소리가 들려온다. 구렁이가 물러나고 아침이 밝아 종루에 가보니 그곳에는 어제 구한 새끼 까치의 어미새들이 죽어 있었다. 나그네 선비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며 종을 울린 것이다. 전래동화 ‘은혜 갚은 까치’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분명하다. 남이 내게 베풀어준 호의에 감사할 줄 아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덕목이다. ‘짐승마저도 은혜를 갚는다’는 식으로 그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은혜 갚은 까치’가 있다면 이솝 우화에는 ‘사자와 생쥐’가 있고, 일본에는 ‘학의 보은’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교훈의 취지는 대동소이하다. 남이 내게 호의를 베풀어준다면 당연하게 여기지 말 것. 특히 그 도움이 크고 중요한 것이었다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은혜를 갚을 것. 은혜를 모르는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하지 말 것.
감사(Gratitude)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버드대학 연구팀이 평균 나이 79세 미국 여성 4만9275명을 대상으로 수행하여 2024년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일상생활에서 늘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사망률이 29%나 낮았다고 한다. 사회적 차원에서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서로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조직이나 집단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철학자들이 감사를 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 전까지는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였을까? 전지전능한 신이 존재하는가, 이 우주가 영원한 곳인가, 아니면 우리의 도덕적 삶은 어떤 이성적 근거 위에서 가능한가, 같은 거창한 주제를 다루는 것만 해도 벅찰 지경이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아무튼 1981년 영국 헐(Hull) 대학의 A. D. M. 워커가 ‘감사함과 감사’(Gratefulness and Gratitude)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감사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우리는 2012년 위스콘신 대학의 션 매컬리어가 발표한 논문 ‘명제적 감사’(Propositional Gratitude)와 후속 논의들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
오늘날 철학자들은 감사를 크게 둘로 나눈다. 첫째, “하느님 감사합니다, 오늘이 금요일이네요”라든가, “건강하게 살아 있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같은 ‘명제적 감사’가 있다. 특정 인물이 아니라 좋은 상태나 사건을 두고 긍정적 감정을 느끼고 표출하는 것이다. 이는 기쁨이나 안도에 더 가까울 수 있다.
그러므로 철학자들은 두 번째 유형의 감사, 즉 ‘전치사적 감사’(prepositional gratitude)에 주목한다. 전치사적 감사란 ‘...에게’라는 뜻을 지니는 전치사 ‘to’를 포함하는 감사다. “그 사람이 나를 도와줘서 감사하다”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여기에는 수혜자(Y), 은혜를 베푼 사람(R), 그 사람이 한 행위(φ)가 포함되어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인격적(personal) 감사’라 할 수 있겠다.
2016년 6월 23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서울시 추죄 6.25전쟁 제76주년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고운호 기자
은혜 갚은 까치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나그네 선비는 구렁이를 쏘아 죽였다. 그 구체적인 행위로 인해 까치 부부는 수혜자가 되었고 선비는 은혜를 베푼 사람이 되었다. 까치 부부는 선비에게 인격적 감사를 표하기 위해, 그날 밤 수혜자에서 은혜를 베푸는 주체가 되었다. 손발이 묶인 채 붙들려 있는 선비를 위해 머리가 깨지도록 종을 들이받아 그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이 등장한다. 선비는 까치 새끼들의 목숨을 구했다. 자식은 목숨만큼, 아니 목숨보다 더 소중한 존재이니 까치 부부가 죽음을 무릅쓰고 종을 친 것은 당연한 일 같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활 잘 쏘는 선비에게 구렁이를 쏘아 죽이는 것은 그리 어렵거나 본인을 큰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면 작은 까치가 온 산에 울리도록 종을 치려면 머리가 깨지고 목이 부러지도록 종에 몸을 부딪쳐야 한다. 선비는 작은 호의를 베풀었지만, 까치 부부는 모든 것을 희생하며 되갚았다는 이야기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인격적 감사에 수반되는 구체적 행위는 대칭적이지 않다. 고마운 마음과 은혜를 서로 똑같이 1:1로 주고받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마치 구렁이를 쏘아 죽이는 일과 종을 울리는 일의 위험도가 같지 않았던 것과 같다. 감사할 일은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 속에서 벌어지며, 수혜자와 은혜를 베푼 사람의 관계 역시 많은 경우 동등하지 않은 것이다.
철학적 논점들이 쏟아져 나오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현실 세계에는 군인이나 경찰, 소방관처럼 타인을 위해 때로는 목숨까지 바쳐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희생과 헌신도 감사의 대상일까? 그들은 그저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을 뿐이니, 다시 말해 자발적인 행위의 주체가 아니니, 따로 감사를 표할 필요가 없는 걸까?
개전 한 달도 안 된 1950년 7월 20일, 인공기를 앞세우고 대전 시내로 진주해 들어오는 북한군 제3사단. /청미디어
가장 가깝고 직접적인 사례를 들어보자.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생사의 기로에 놓였다. 북한의 기습 남침에 맞설 힘이 없었지만 약 한 달간 전열을 유지하며 후퇴하여 낙동강에 최후 방어선을 쳤다. 신생 국가 대한민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위기였다. 까치 둥지를 향해 구렁이가 달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은 전래동화와 달랐다. 소련과 중국을 등에 업은 북한은 유엔군을 지독하게 물고 늘어졌다. 미국은 178만명이 참전해 3만6574명의 전사자를 냈고, 영국은 1078명의 자국 청년들의 생명을 바쳤다. 튀르키예,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그리스, 태국, 네덜란드,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벨기에, 필리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뉴질랜드는 모두 수백에서 수십 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냈다.
상식적인 보통 사람의 윤리적 직관이 향하는 결론은 분명하다. 이것은 감사를 표해야 마땅한 일이다. 지구 반대편, 어딘지도 모르는 나라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싸운 이들에게 고마움을 표하지 않는다면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기준마저 버리는 일이다. 지난 5월 서울 광화문광장에 개장한 ‘감사의 정원’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이 전반적으로 우호적이었던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평화를 상징해야 할 광화문광장에 ‘받들어 총’을 모티프로 한 기념물이 들어서서는 안 된다는 둥, 용산 전쟁기념관에나 설치되었어야 한다는 둥, 온갖 볼멘소리가 불거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유엔군은 그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니 고마워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복잡한 심정이 들기도 했다. 철학자의 사고실험에나 나올 이야기가 공론장에서 버젓이 오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대단한 철학적 논의가 필요한 일조차 아니다.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 말했듯, 감사의 마음을 잊는 것은 “인류가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죄악 중 가장 끔찍하고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정치에 눈이 멀어 개념을 상실한 어른들에게, 철학이 너무 어렵다면 전래동화라도 읽어볼 것을 권한다.
2022년 11월 11일 부산 UN기념공원에서 열린 UN참전용사 국제추모식. /김동환 기자
댓글 0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