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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속에 빛난 '리차드 위트 컴' 장군
2026. 06. 25. 오전 01:14
541953년 11월 27일, 부산역전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 29명의 사상자가 생겼고, 3만여 명의 피난민이 집을 잃었다. 같은 해 1월 30일에 난 국제시장 화재로 엄청난 손실과 이재민을 낸 지 10개월 만에 또다시 큰불이 난 것이다.
이때 주한 미군 군수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차드 위트 컴’ 장군(1894~1982)은 상급자 승인 없이 엄동설한에 직면한 피난 이재민들에게 엄청난 양의 식량과 피복, 텐트 등 다량의 군수 물자를 즉시 나눠주었다. 이 일로 장군은 미국의회 청문회에 소환되었다. 현직 군수사령관임에도 이례적으로 ‘직권남용’을 추궁당하는 불명예를 겪은 것이다.
위트 컴 장군은 청문회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의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다.” 장군의 발언이 끝나자 의원들은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쳤다. 의회 발언 이후 군수품 지원을 추가로 받아낸 것은 덤이었다.
미국 캔자스에서 태어난 장군은 와이오밍대 ROTC를 거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유럽 쪽에서 복무하다 준장으로 진급하고 필리핀 마닐라에서 항만사령관을 지냈다. 6·25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임시수도 부산에서 군수사령관으로 복무하던 중 부산역전 대화재를 보고는 ‘군복 입은 성자’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장군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부산지역의 부족한 의료·교육시설과 전쟁고아 등 사회 전반에 깊은 애정을 갖고 지원에 나섰다.
장군은 전후에 환자가 급증하자 의료시설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병원 건립을 위하여 각 부대원과 함께 월급의 1%를 헌금하는 운동을 일으키는 한편 ‘대한미군원조처(AFAK)’의 기금을 조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이 직접 갓을 쓰고 한복을 입고 모금한 사실이 미국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 결과 160병상을 갖춘 3층짜리 메리놀병원을 개원할 수 있었고, 성분도병원(현 부산성모병원)과 복음병원(현 고신대 복음병원) 설립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위트 컴 장군은 교육 인프라 구축에도 앞장섰다. 대연동에서 개교한 부산대학교에서 수산대와 인문대 사이에 내부 갈등이 발생했다. 그 결과 수산대학은 분리되어 부산수산대(부경대 전신)로 대연동에 남고, 부산대학교는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위트 컴은 한국 정부를 설득한 끝에 장전동의 50만평을 무상으로 받게 하고 건설비용 25만 불까지 대주었다. 또한, 미 공병대를 시켜 학교 용지를 조성하고 부산대 정문까지 진입도로(온천장~부산대 구간 1.6km)도 닦아 학생들의 등하굣길을 터주었다.
‘리차드 위트 컴’ 장군은 1954년 말에 준장으로 퇴역했다. 그는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 고문을 맡아 한미 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미군들의 유해송환을 위해 애쓰기도 했다. 피난민들의 주거 문제를 해결했고, 전쟁 통에는 보육원도 만들어 고아들을 거두고 살폈다. 장군은 부산지역사회 재건 활동뿐만 아니라 노약자와 산모 돕기 등 다양한 분야에서 큰 도움을 주었다.
6·25 전쟁 때 피난민을 품어준 인물들은 더 있었다. 1950년 1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던 유엔군과 국군이 북한 주민 10만여명을 배에 태워 극적으로 탈출시킨 ‘흥남철수 작전(10만명의 기적)’의 주역은 미 제10군단 작전참모였던 ‘에드워드 포니’ 대령과 레너드 라루 선장이었다. 이들은 피난민을 태울 수 있게 군수 물자를 버리는 적재 계획을 세운 숨은 공로자였다. 또한, 한국 측의 현봉학 박사, 김백일 장군, 손원일 제독은 미군 지휘관을 설득시킨 ‘‘한국의 쉰들러’들이었다.
폐허가 된 한국의 재건과 미군 유해송환에 힘썼던 위트 컴 장군은 1982년에 별세하여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되었다. 이곳에 묻힌 미군 전사자 32명 중 유일한 장성급이다. 한국 정부는 장군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장군과 1964년에 결혼한 한묘숙 여사는 한국 최초의 아동 보육시설 ‘익선원’을 운영했고, 남편 사후에는 ‘위트 컴 희망재단’을 꾸려나갔다. 한국과 한국인을 극진히 사랑했던 장군은 지금도 부산 사람들의 가슴 속에 ‘군복(軍服) 입은 성자(聖者)’로 남아 있다.
이정호 수필가·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이때 주한 미군 군수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차드 위트 컴’ 장군(1894~1982)은 상급자 승인 없이 엄동설한에 직면한 피난 이재민들에게 엄청난 양의 식량과 피복, 텐트 등 다량의 군수 물자를 즉시 나눠주었다. 이 일로 장군은 미국의회 청문회에 소환되었다. 현직 군수사령관임에도 이례적으로 ‘직권남용’을 추궁당하는 불명예를 겪은 것이다.
위트 컴 장군은 청문회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의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다.” 장군의 발언이 끝나자 의원들은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쳤다. 의회 발언 이후 군수품 지원을 추가로 받아낸 것은 덤이었다.
미국 캔자스에서 태어난 장군은 와이오밍대 ROTC를 거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유럽 쪽에서 복무하다 준장으로 진급하고 필리핀 마닐라에서 항만사령관을 지냈다. 6·25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임시수도 부산에서 군수사령관으로 복무하던 중 부산역전 대화재를 보고는 ‘군복 입은 성자’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장군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부산지역의 부족한 의료·교육시설과 전쟁고아 등 사회 전반에 깊은 애정을 갖고 지원에 나섰다.
장군은 전후에 환자가 급증하자 의료시설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병원 건립을 위하여 각 부대원과 함께 월급의 1%를 헌금하는 운동을 일으키는 한편 ‘대한미군원조처(AFAK)’의 기금을 조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이 직접 갓을 쓰고 한복을 입고 모금한 사실이 미국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 결과 160병상을 갖춘 3층짜리 메리놀병원을 개원할 수 있었고, 성분도병원(현 부산성모병원)과 복음병원(현 고신대 복음병원) 설립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위트 컴 장군은 교육 인프라 구축에도 앞장섰다. 대연동에서 개교한 부산대학교에서 수산대와 인문대 사이에 내부 갈등이 발생했다. 그 결과 수산대학은 분리되어 부산수산대(부경대 전신)로 대연동에 남고, 부산대학교는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위트 컴은 한국 정부를 설득한 끝에 장전동의 50만평을 무상으로 받게 하고 건설비용 25만 불까지 대주었다. 또한, 미 공병대를 시켜 학교 용지를 조성하고 부산대 정문까지 진입도로(온천장~부산대 구간 1.6km)도 닦아 학생들의 등하굣길을 터주었다.
‘리차드 위트 컴’ 장군은 1954년 말에 준장으로 퇴역했다. 그는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 고문을 맡아 한미 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미군들의 유해송환을 위해 애쓰기도 했다. 피난민들의 주거 문제를 해결했고, 전쟁 통에는 보육원도 만들어 고아들을 거두고 살폈다. 장군은 부산지역사회 재건 활동뿐만 아니라 노약자와 산모 돕기 등 다양한 분야에서 큰 도움을 주었다.
6·25 전쟁 때 피난민을 품어준 인물들은 더 있었다. 1950년 1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던 유엔군과 국군이 북한 주민 10만여명을 배에 태워 극적으로 탈출시킨 ‘흥남철수 작전(10만명의 기적)’의 주역은 미 제10군단 작전참모였던 ‘에드워드 포니’ 대령과 레너드 라루 선장이었다. 이들은 피난민을 태울 수 있게 군수 물자를 버리는 적재 계획을 세운 숨은 공로자였다. 또한, 한국 측의 현봉학 박사, 김백일 장군, 손원일 제독은 미군 지휘관을 설득시킨 ‘‘한국의 쉰들러’들이었다.
폐허가 된 한국의 재건과 미군 유해송환에 힘썼던 위트 컴 장군은 1982년에 별세하여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되었다. 이곳에 묻힌 미군 전사자 32명 중 유일한 장성급이다. 한국 정부는 장군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장군과 1964년에 결혼한 한묘숙 여사는 한국 최초의 아동 보육시설 ‘익선원’을 운영했고, 남편 사후에는 ‘위트 컴 희망재단’을 꾸려나갔다. 한국과 한국인을 극진히 사랑했던 장군은 지금도 부산 사람들의 가슴 속에 ‘군복(軍服) 입은 성자(聖者)’로 남아 있다.
이정호 수필가·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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