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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주의보’를 발령하자

2026. 06. 27. 오전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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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범죄도시’ 시리즈에서 빌런들을 일망타진하는 형사로 출연한 배우 마동석. 하지만 현실은 이와 다르다. 빌런들이 득실대고 있지만 경찰·검찰·법원은 이들을 제대로 잡아서 벌하지 못하고 있다. /데이드림 엔터테인먼트

꼭 돕고 싶은 소수의 사건을 맡다 보니 결국 선량한 분들을 많이 변호하게 된다. 평생 경찰서 한 번 가본 적 없고, 충돌이 생길 것 같으면 그냥 양보하며 살아온 이들은 대개 피해자들이다. 이런 분들일수록 쉽게 빌런들의 먹잇감이 된다.

지난주 고급차 수리점을 하는 A씨 아내가 찾아왔다. 빌런1이 폐차 직전의 람보르기니를 수리해 달라고 사정하며 부품 값으로 3500만원만 줬는데, A씨는 그 돈으로는 도저히 부품을 구하지 못해 원하는 기일까지 수리를 마치지 못했다. 그러자 빌런1은 “수리비를 받고도 제때 못 고친 건 사기다, 변호사 시켜 고소하겠다, 깡패를 불러 자식도 손보겠다, 막으려면 담보를 내놓으라”며 몇 달간 하루 5~10회씩 전화해 협박했다. 부부는 고소당하면 무조건 감옥에 가는 줄 알고, 친척의 페라리와 아내 부동산을 담보로 내주고 아내 명의로 1억5000만원짜리 약속어음까지 써줬다. 위자료로 수천만원을 현금으로 줬다. 빌런1의 요구에 응하다 A씨 아내는 매달 천만원 넘는 이자를 내게 되자 파산을 신청했고, A씨는 창고에서 극단적 선택을 하려다 출동한 경찰에 가까스로 구조됐다. 그런데도 빌런1은 돈을 더 요구하며 A씨 부부가 살던 집까지 넘봤다. 추가 요구액을 마련하지 못해 사기죄로 고소당할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한 A씨 처가 비로소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나는 그 모든 말이 석연치 않았다. 곧장 빌런1에게 문자메시지로, 수리 계약을 해제하니 람보르기니는 가져가되 공임과 보관 비용을 달라, 공갈·강요로 받아간 어음과 합의서는 취소하니 무효이고 담보로 가져간 페라리도 즉시 돌려달라고 통보했다. 그러자 빌런1은 내게도 “협박하지 마라, 변호사 통해 민·형사 책임을 묻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변호사 연락처를 알려주면 그와 말하겠다”는 거듭된 요구에는 동문서답만 늘어놓았다. 처음부터 변호사도 없었고, 고소장 운운한 것도 일종의 쇼였던 것이다. A씨 부부는 빌런1이 전화하지 않는 것만으로 몇 달 만에 처음 푹 잤다고 했지만, 이제 시작이다. 빌런1을 감옥에 보내고 빼앗긴 돈과 담보를 찾아야 한다.

요즘 체감상 가장 심각한 문제는 노인을 상대로 한 사기의 폭증이다. 큰 회사를 일구고 은퇴한 80대 후반의 B씨 노부부도 당했다. 빌런2는 어느 날부터 매일 B씨 사무실에 와서 함께 식사하고 말벗이 되고 병원까지 모셨다. 낯선 사람에게도 밥 한 끼는 먹여 보낼 만큼 정 많은 B씨 부부는 빌런2를 식구처럼 아꼈다. 그러던 어느 날 빌런2가 투자를 권했다. “제가 부동산 사업을 하는데 20억만 넣으세요. 6개월이면 원금에 이익 10억까지 돌려드립니다.” 각서를 쓰고 잘못되면 건물들을 주겠다는 담보 문서까지 내밀어 B씨 부부는 믿고 20억원을 줬다. 빌런2는 재산이 상당한 B씨 부부의 60대 아들도 찾아가 같은 방식으로 30억원을 받아냈다. 그러나 수익금은커녕 원금도 못 받은 B씨 일가족이 변제를 독촉하자 빌런2는 “최종적으로 170억을 빌려주면 그동안의 모든 원리금에 고급 주택 2채까지 주겠다”는 각서를 내밀며 또 돈을 요구했다.

B씨 가족이 그제야 수상함을 깨닫고 거절하자, 매일 문안 전화를 하던 빌런2는 갑자기 연락을 끊고 잠적했다. 알고 보니 담보 문서는 모두 허위였고 제 앞으로 재산이 없어 민사소송에서 이겨도 받아낼 것이 없었다. 중간에 돌려준 3억원조차 아들에게 사기 친 돈이었다. B씨 부부는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고통으로 건강이 크게 상했다.

내가 싸우는 황당한 빌런은 이 밖에도 많다. 법무법인 이사 명함을 들고 다니며 무당처럼 굿도 하는 빌런 3은 “사업비를 내면 BTS와 콜라보를 성사시켜주고 리움미술관을 빌려 전시해주겠다”고 사기를 쳤다가 우리가 고소해서 법정에 섰다. 후배 봉직의 2명에게 병원을 넘긴다며 10억원씩 받고는 선납금 시술 채무를 병원당 18억원까지 숨겨둔 의사 빌런4도 1년 반 넘게 싸워 겨우 검찰에 송치했다. 필리핀에 간 피해자를 차에 태우고 다니면서 마닐라의 큰 빌딩들을 가리키며 자기가 시행한 사업들이라고 속이고 필리핀에서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시민권과 코인도 준다고 속여 20억여원을 편취하고 돈을 돌려달라는 피해자를 감금까지 한 빌런5도 감옥으로 보내기 위해 경찰에 수시로 연락 중이다.

이런 빌런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피해자에게 특별히 원한이 있어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먹잇감을 찾고 있을 때 마침 피해자들이 나타난 것이다. 이들은 피해자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떻게든 최대한의 이득을 챙기려 한다. 즉, 이들은 누구나 표적으로 삼으며 절대로 스스로 멈추지 않는다. 이런 빌런들을 반드시 잡아서 감옥에 넣어야 하는 이유다.

그렇지 않으면 빌런1은 또 다른 수리점에 못 고칠 차를 맡기고 공갈로 돈을 뜯을 것이고, 빌런2는 또 다른 외로운 노인의 밥상 맞은편에 앉아 투자를 권유할 것이다. 빌런3은 블랙핑크와의 콜라보를 사칭해 사기 칠 것이고, 빌런4는 또 다른 병원에 선납금 채무를 몰래 심어둘 것이고, 빌런5는 필리핀에 관심 있는 사람을 차에 태우고 아무 빌딩이나 가리키며 자기가 시행한 사업이라 설명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요즘 경찰·검찰·법원이 이들을 제대로 잡아서 벌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경찰은 기본적으로 피해자 편이라는 생각을 안 하는 것 같다. 판사보다 더 중립적인 태세를 취하고 피해자에게 냉담하며 증거도 스스로 찾지 않고 피해자에게 가져오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유죄는 모든 요건을 입증해야 하지만 무혐의는 한 요건만 무너뜨려도 되는 데다가, 빌런을 많이 잡는다고 경찰에 인사고과 점수를 더 주는 것도 아니니 면죄부 불송치가 폭증한다. 나도 판사 출신이지만, 판사도 실망스러울 때가 적지 않다. 손해배상액 계산이 복잡한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는 대개 기각으로 흐르고, 항소해도 웬만하면 기각된다. 성실한 판결의 결과일 때도 있겠지만, 판사들이 어지간하면 판결문 쓰기가 복잡한 쪽으로 판결하지 않는 경향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점점 더 많은 빌런들이 좀비처럼 몰려오고 있다. 국가가 제대로 못 잡는다면, 시민들이 스스로 피할 수 있도록 예보라도 해달라. 성폭력범죄자 신상공개제도처럼 이런 빌런들의 명단도 공개하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기상청의 호우주의보처럼 누가 어느 지역에서 사기를 치는지 ‘빌런주의보’를 발령해야 한다. 빌런의 명예를 보호하는 것보다 피해자가 입을 피해를 막는 게 훨씬 더 중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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