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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00만 명분 코카인 실은 배, 왜 강릉까지 왔나 [사건 플러스]

2026. 08. 15. 오전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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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4월 강원 강릉시 옥계항에 정박한 외국 선적 벌크선에서 동해지방해양경찰청과 관세청 관계자들이 적발한 1㎏짜리 코카인 추정 물질이 담긴 상자를 옮기고 있다. 동해지방해양경찰청 제공

2025년 4월 2일 동틀 무렵 강원 강릉시 옥계항. 해양경찰특공대(SSAT)와 관세청 단속 요원들이 노르웨이 선적 화물선(3만2,402톤급)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과 국토안보수사국(HSI)이 이 배에 다량의 코카인이 실렸다는 첩보를 한국 수사당국에 전달한 뒤였다.

오전 6시 30분쯤 화물선이 닻을 내리자 수사 요원 90여 명이 배에 진입했다. 출입구를 봉쇄하고 내부를 수색하던 이들은 기관실 안 코퍼댐(cofferdam)에서 마약 의심 물질을 무더기로 찾아냈다. 코퍼댐은 기름 유출을 막기 위해 만든 격리 공간이다.

정밀 감정 결과 1㎏씩 포장된 코카인 1,690개였다. 시가는 8,540억 원으로, 5,700만 명이 한 차례씩 투약할 수 있는 양이다. 시멘트를 싣기 위해 빈 상태로 옥계항에 들어온 배에 국내 최대 규모의 코카인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코카인은 어디에서 실렸고, 왜 강릉까지 오게 됐을까.

2025년 5월 강원 동해시 지가동 동해지방해양경찰청에 동해지방해양경찰청·서울본부세관 합동수사단이 같은 해 4월 2일 강릉 옥계항의 외국 선박에서 압수한 코카인이 놓여 있다. 동해지방해양경찰청 제공

해경은 국제 마약 카르텔이 거액을 미끼로 필리핀 선원들을 포섭해 코카인 운반에 동원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공소사실에 따르면 옥계항에서 붙잡힌 필리핀 국적 갑판원 A(29)씨는 지난해 1월 같은 국적의 선박 조리원 B씨에게서 "코카인을 운반하면 400만 필리핀 페소(당시 약 9,400만 원)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B씨가 같은 해 2월 5일 페루의 한 항구에서 하선하자 A씨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터미네이터' '미스터 챙' '미스터 치프'로 불린 마약상들과 직접 연락했다. 다른 선원들은 코퍼댐을 열거나 항로 정보를 전달하고, 선장이 코카인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역할을 맡은 혐의를 받는다.

이들은 사흘 뒤 페루 해안에서 약 50㎞ 떨어진 바다에서 코카인을 실은 보트 2척과 접선한 것으로 조사됐다. 선장 몰래 이른바 '닌자'로 불린 조직원 10여 명을 배에 태워 코퍼댐으로 안내했고, 이들은 약 2시간 30분 동안 코카인 1,690개를 56개 자루에 나눠 숨긴 것으로 파악됐다.

갑판원 E(41)씨도 A씨에게서 "300만 페소(약 7,500만 원)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가담한 혐의를 받는다. E씨는 항로가 표시된 해도(海圖)를 찍어 마약상들에게 아홉 차례 전송한 것으로 드러났다.

2025년 4월 강원 강릉시 옥계항에 정박한 외국 선박에서 동해지방해양경찰청과 관세청 관계자들이 적발한 1㎏짜리 코카인 추정 물질 수십 개가 든 상자를 옮기고 있다. 동해지방해양경찰청 제공

코카인을 실은 배는 페루에서 파나마와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향했다. A씨 일당은 항해 도중 바다에 코카인을 던지면 다른 배가 건져가는 '드롭 앤드 픽업(Drop & Pick up)' 방식으로 물건을 넘기려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일본 동쪽 공해상과 일본·제주 사이 해역, 중국 근해에서 네 차례 인계를 시도했지만 거센 파도와 강풍에 번번이 실패했다. 결국 코카인을 하역하지 못한 화물선은 예정된 항로에 따라 옥계항으로 향했다. 이들은 시멘트를 싣고 출항한 뒤 다시 마약을 인계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하지만 미국 수사기관이 마약 운송 정보를 포착해 한국 측에 알리면서 계획은 틀어졌다. 해경과 관세청은 옥계항에서 A씨 등 필리핀 선원 4명을 붙잡았다.

중국에서 하선해 달아난 기관원 D(55)씨는 인터폴 적색수배 끝에 2025년 7월 아르헨티나에서 검거돼 3개월 뒤 국내로 송환됐다. 필리핀 국적 선장은 한 달 넘게 조사를 받았지만 범행에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받은 뒤 한국을 떠났다.

해경과 세관 등으로 구성된 합동수사단은 "국제 마약 카르텔까지 연계된 국내 최대 규모 마약 범죄"라며 "코카인이 실제 유통되지는 않았으나 우리나라도 코카인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 매우 엄중한 사안"이라고 밝혔다.

수사당국은 마약 카르텔이 선원을 개별 포섭한 뒤 SNS로 지시를 주고받고, 일부 가담자를 기착지에서 하선시키는 방식으로 조직의 실체를 감춘 것으로 보고 있다.

전직 마약수사관 장모(62)씨는 "고액을 미끼로 선원을 하나하나 포섭하고 중간 기착지에서 내리게 하는 단기 아르바이트식 운반 방식"이라며 "한 번 동원한 사람을 교체해 윗선 추적을 어렵게 하려는 수법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국제 수사당국은 조리원 B씨 등 필리핀 선원 3명을 인터폴 적색수배 명단에 올렸다. 해경과 미국·필리핀 수사당국도 카르텔 윗선과 코카인의 최종 목적지를 추적하고 있다.

코카인 1.7톤 운반의 대가, 징역 25년

춘천지법 강릉지원은 2025년 11월 범행을 주도한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징역 25년을 선고했다. A씨의 권유로 가담해 마약상에게 해도 등을 전달한 혐의를 받는 E씨는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서울고법 춘천재판부 형사1부(부장 이은혜)는 올해 4월 A씨의 항소를 기각하고 징역 25년형을 유지했다. E씨의 형량은 징역 12년으로 낮췄다. 아르헨티나에서 송환된 D씨도 7월 항소심에서 1심과 같은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1·2심 재판부는 "상당한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해 여러 국가의 국경과 대양을 넘나들며 막대한 규모의 코카인을 운반·전달·유통하려 한 계획적·조직적 범죄"라고 판단했다.

이어 "1,690㎏의 코카인이 계획대로 유통됐다면 여러 국가의 많은 사람이 마약 매매를 비롯한 범죄에 연루됐을 것"이라며 "그 파급 효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파괴력을 지녀 죄책이 무겁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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