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딩..
날씨 정보를 가져오는 중...
Phil Life
🛒 필리핀 교민 쇼핑 필수 코스

쇼피(Shopee) 오늘만 이 가격, 타임세일 즉시 확인!

할인받기 〉
local

[손기호의 일본 탐방] 교토서 만난 '가해의 기록'…일본군 주둔 사진과...

2026. 08. 15. 오전 11:49
2
news image
지난 7월28일 교토시 기타구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2층 세미나실에서 90세가 넘은 아다치 교코(足立恭子) 씨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박영심(朴永心) 씨 자료를 설명하고 있다. 오른쪽은 같은 날 1층 전시장에 놓인 한국 국어 교과서의 유관순 열사 그림으로, 한국인 국어교사 부부가 재일교포 나카이 히로코 씨에게 선물한 최신판이다. (사진=손기호 기자) 일본군이 부산에 주둔했던 자리를 일본인들이 직접 찾아가 사진으로 찍어 걸었다. 같은 건물 2층에서는 일본인이 일본인들 앞에서 '위안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지난달 28일 일본 교토에서 본 풍경이다. 한국이 광복 81주년을 앞둔 시점. 일본의 8월은 원폭의 달이다.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 15일 종전. 일본 NHK 등에서는 피폭자의 증언을 내보내고 신문은 특집을 싣는다. 자신들이 무엇을 당했는지만 말한다. 당시 일본군이 이웃 나라를 침략해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하는 자리는 좀처럼 없다. 그런데 교토에서 일본이 전쟁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교토시 기타구 도지인기타마치,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이곳에서 '2026년(제46회) 평화를 위한 교토의 전쟁전(平和のための京都の戦争展)'이 열리고 있었다. 7월25일부터 8월1일까지 휴일 빼고 이레 동안 열리고 있었다. 전쟁과 평화 관련 박물관 상설 전시도 함께 볼 수 있었다. 지하에는 이 대학이 운영하는 상설 전시가 있고, 1층에서 이번 특별 전시가 열렸다. 2층 세미나실과 3층 강의실에서는 강연이 이어졌다. 특별전시와 세미나는 '평화를 위한 교토의 전쟁전 실행위원회'라는 시민 조직이 주최했다. 대학 시설을 빌려 46년째 이어오고 있다고 했다. 전시물들은 증언자들의 사진과 그림, 옛 신문 지면과 문서를 복제해 패널로 만들어 벽에 건 사진전이었다. 일본이 전쟁 가해자였다는 증거를 여기저기서 모아 전시했다. ■ "일본이 가해자라는 사실도 알려야 한다" 이 사진들을 제공한 사람을 전시장에서 만났다. 재일교포 2세 나카이 히로코(中井裕子, 71) 씨였다. 나카이 씨는 교토에서 나고 자랐고, 교토대학 교육학부를 나와 일본어 교사로 일했다고 소개했다. 기자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한글 공부 모임(ハングルコンブの会)' 사무국 운영도 적혀 있었다. 지난 7월28일 교토시 기타구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1층 전시장에 걸린 '한국·부산/진해/가덕도 평화투어' 보고 패널. 재일교포 나카이 히로코 씨(71세, 여, 오른쪽)를 비롯한 일본 시민들이 올해 4월 3~6일 현지를 답사해 옛 일본군 시설이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 기록한 사진들. (사진=손기호 기자) 그는 한국을 자주 찾는다고 했다. 갈 때마다 옛 일본군 주둔지를 돌며 사진을 찍고 자료를 모았다. 나카이 씨는 "일본은 그동안 원폭 피해자라는 사실만 강조해 왔다"며 "하지만 일본이 전쟁 가해자라는 사실도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삼촌이 일본군으로부터 입은 피해를 이야기했다. 그는 "유가족의 입장으로 일본군이 얼마나 한국과 다른 나라에 피해를 줬는지를 알리고 있다"고 했다. 그가 사는 교토도 예외가 아니라고 했다. 교토부 안에 일본군 시설이 있었고 전쟁 준비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부 북쪽 동해 연안의 군항 마이즈루는 패전 뒤 대륙에서 돌아온 병사들이 들어온 항구였다. 나카이 씨가 이런 자리에 계속 나오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전쟁은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가 맡은 자리는 가해의 증거만이 아니었다. 한쪽에는 한국 국어 교과서가 놓여 있었다. 한국인 국어교사 부부가 찾아와 최신판을 선물하고 갔다고 했다. 반듯한 한글로 적힌 유관순 열사의 이야기도 함께 펼쳐 놓았다.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나카이 씨는 "읽고 쓰는 것은 되는데 말할 기회가 없어 말하기가 약하다"며 "손석희 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방송을 자주 듣는다"고 했다. 한국을 좋아하는 일본인들, 특히 한글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함께 공부도 하고 있다고 했다. ■ 부산부터 교토까지…일본인들이 모은 일본군의 침략 증거들 전시장의 벽에 걸린 패널은 일본군이 아시아 각지에서 저지른 일을 증거로 내걸고 있었다. 나카이 씨를 비롯해 일본군 피해 유족들이 모은 사진들과 자료들이었다. 가장 먼저 한국 관련 자료에 눈길이 갔다. 올해 4월 3일부터 6일까지 나카이 씨를 비롯한 일본 시민들이 부산과 진해, 가덕도를 답사하며 찍어 온 사진들이었다. 부산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을 찍은 사진과 1908년 부산 일본 거류지 평면도도 함께 걸렸다. 일본군이 주둔했던 자리와 옛 헌병대 터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를 담은 것으로, 병사 터 사진에는 '이곳도 민가로 사용돼 왔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교토 안에 있던 일본군 시설을 다룬 패널도 걸렸다. 1941년 제16사단 사령부 사진과 그 건물이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를 나란히 붙여놓았다. 지난 7월28일 교토시 기타구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1층 특별전시장에 놓인 자료들. 오른쪽은 1943년 일제시대 육군성이 배포한 포스터 '쏘고 또 쏘리라'로, 일본군 병사가 미국 성조기와 영국 국기를 밟고 선 모습. 왼쪽 위는 대전차 공격법을 담은 소책자, 아래는 쇼와천황이 1947년 미국 측에 오키나와의 장기 점령을 제안했다는 이른바 '천황 메시지'를 다룬 류큐신보 기사다. 일본이 침략 전쟁을 벌인 사실을 증거하는 기록들이다. (사진=손기호 기자) 지난 7월28일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1층 전시장에 걸린 패널. 1941년 교토의 일본군 제16사단 사령부(왼쪽)와 현재 성모여학원 본관으로 쓰이고 있는 같은 건물을 나란히 붙여, 교토가 침략 전쟁의 후방 기지였음을 보여준다. (사진=손기호 기자) 한국만이 아니었다. 아시아 각국의 전쟁 사망 피해를 표시한 지도에는 한국·북한 약 20만명, 중국 1000만여명, 인도네시아 400만명, 베트남 200만명, 필리핀 111만명 등이 적혀 있었다. 1945년 4월 대본영 육군부가 배포한 소책자 '국민항전필휴' 사진도 있었다. 본토 결전에 대비해 '죽창과 낫으로 미군을 쓰러뜨리는 방법'을 그림으로 실은 것이다. 지하 1층으로 내려가니 이 박물관의 '전쟁과 평화' 관련 상설 전시도 있었다. 이 박물관은 1992년 리츠메이칸대학이 세운 세계 최초의 종합 평화박물관으로, 2023년 9월 전면 개편해 지하로 상설 전시를 모았다. 4개 테마 가운데 두 번째 이름이 '15년전쟁의 가해와 피해'다. 일본 박물관이 상설 전시 제목에 '가해'를 내건 셈으로 이례적인 모습이었다. 지난 7월28일 교토시 기타구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지하 상설전시장의 '조선(朝鮮)' 코너. '조국을 빼앗긴 사람들'이라는 제목 아래 일본의 조선 침략을 다뤘다. 오른쪽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의 사진과 설명 패널. (사진=손기호 기자) 지난 7월28일 교토시 기타구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1층 전시장에 걸린 1943년 일본 해군성 포스터 '해군은 그대들을 기다린다'. 현재 자위대 기로도 쓰이는 욱일기를 배경으로 소년병 모집을 알리며, 어머니들에게 자식을 전장에 내보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일본이 침략 전쟁에 일본국민을 동원한 사실을 증거하는 기록. (사진=손기호 기자) 전시는 일본군이 한국과 중국, 대만, 동남아시아를 침략한 경위를 문서와 사진으로 배열했다. 전시국제법 관련 책자가 놓였고, 생화학전 부대인 731부대를 다룬 자료와 폭탄 모형도 있었다. 테마마다 관람객에게 던지는 물음이 크게 붙어 있었다. 식민지란 어떤 곳이었나, 전쟁이 시작되면 어떻게 되나, 피해의 진실을 말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마지막 공간에는 전쟁만 없으면 평화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이 놓였다. 빈곤과 차별, 인권 침해가 남아 있는 한 평화가 아니라는 의미다. 옛 신문 지면도 패널로 걸렸다. 도쿄니치니치신문 1931년 10월27일자 '지켜라 만몽(滿蒙), 일본의 생명선'. 만주사변 직후 침략을 방위전쟁이라고 주장한 기사다. 설명 패널은 "'생명선'이라는 말은 이 기사를 계기로 유행했다"고 적고, 괄호로 "도쿄니치니치신문은 현재의 마이니치신문"이라고 덧붙였다. 이 전시의 후원 명단에는 마이니치신문 교토지국이 올라 있다. 90여 년 전 그 지면을 낸 신문이 지금은 이 전시를 후원하고 있다. ■ "성노예제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살인" 이날 오후에는 두 강연도 열렸다. 3층 강의실에서는 유족인 나카이 씨를 비롯해 교토평화유족회가 마련한 시민강좌가 1시30분부터 열렸고, 2층 세미나실에서는 1시부터 일본군 '위안부' 강연이 시작됐다. 일본인이 '위안부' 이야기를 한다기에 나카이 씨에겐 양해를 구하고 위안부 강연을 듣기로 했다. 세미나실 입구 벽보에는 '평화뮤지엄 가이드 체험에서 — 종군위안부 문제에서 현대의 성폭력을 생각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책상이 놓인 세미나실에 앉은 사람은 열 명 남짓이었다. 대부분 백발의 여성이었고, 남성은 기자를 포함해 셋뿐이었다. 발표자는 '평화 도모노카이(平和友の会)'의 아다치 교코(足立恭子) 씨였다. 나눠준 자료집은 7쪽 분량에 참고문헌 목록까지 붙어 있었다. 지난 7월28일 교토시 기타구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2층 세미나실에서 아다치 교코 씨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박영심(朴永心) 씨 사진을 가리키고 있다. 1944년 9월 중국 윈난성 라멍(拉孟)에서 일본군이 전멸한 뒤 연합군에 구출된 조선인 위안부들을 찍은 것. 만삭의 여성이 박 씨. 그는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여성국제전범법정을 계기로 사진 속 인물이 자신이라고 밝혔다. (사진=손기호 기자) 90대에 접어든 아다치 씨는 태평양전쟁이 끝났을 때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고 했다. 1955년 스무 살에 교사가 됐다. 퇴직 후에는 이 강연이 열린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에서 자원봉사 가이드로 일했다. 그가 강연에 나선 것은 서울에서 위안부 피해자를 만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1992년 12월 그는 '한국에 대한 가해의 역사를 배우는 평화 투어'에 참가해 서울에서 김학순 씨와 황금주 씨의 증언을 들었다. 1991년 김학순 씨가 처음 실명으로 나선 이듬해였다. 아다치 씨는 그날을 이렇게 전했다. 두 사람은 10대 소녀 시절 집이 가난해, 일본군 병사(兵舍)에 가서 식사와 세탁 일을 하면 수입이 된다는 지역 경찰의 말을 듣고 가족의 생계를 돕겠다며 응모했다. 끌려간 곳에서는 방에 갇혀 매일 수십 명의 병사에게 강간당했고, 도망친 동료는 살해됐다. 아다치 씨는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울면서 메모를 했지만, 나는 몸 전체가 굳어 메모조차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통역을 맡은 사람도 "너무 참혹한 이야기라 전부는 통역할 수 없었다"고 했다고 그는 전했다. 그가 발표에서 띄운 사진은 기자가 학창시절 한국 교과서에서 봤던 사진이었다. 1944년 9월 중국 윈난성 라멍(拉孟)에서 일본군이 전멸한 뒤 촬영된 조선인 위안부 네 명. 그중 만삭인 여성이 박영심(朴永心) 씨다. 박 씨는 1921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17세에 속아 중국 난징으로 끌려갔고,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여성국제전범법정을 계기로 사진 속 인물이 자신이라고 밝혔다. 2006년 8월 평양에서 별세했다. 아다치 씨는 "성노예제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살인"이라고 말했다. ■ 판결과 사죄 잘려나가…"다시 전쟁이 가능한 나라로 되어가고 있어 안타까워" 발표의 후반부는 2000년 12월 도쿄에서 열린 '여성국제전범법정'과 그 이후에 대한 설명이었다. 자료집에 따르면 이 법정에는 아시아 각국 피해자 64명을 포함해 1300명이 참가했고, 도쿄재판에서 면소된 쇼와 천황 등 9명을 유죄로 판단하는 판결이 나왔다. 143개 언론사가 취재해 일본 안팎에서 크게 보도됐다. 이듬해 1월 NHK가 이 법정을 다룬 교육 프로그램을 방송하면서 판결도, 기소장도, 가해 병사가 피해 여성에게 사죄하는 장면도 모두 잘려나갔다고 그는 설명했다. 아사히신문은 2005년 1월 당시 관방부장관이던 아베 신조 전 총리 등이 방송 전 NHK 간부와 접촉해 압력을 넣었다고 보도했으나, 아베 전 총리와 NHK는 이를 부인했다. 법정을 주최한 일본 시민단체는 취재에 협력했는데 방송 내용이 달라졌다며 NHK 등을 상대로 소송을 냈고, 2008년 최고재판소에서 패소가 확정됐다. 아다치 씨는 "보고 있으니 분노가 온몸을 뚫고 지나갔다"고 말했다. 이후 중·고교 교과서에서 '위안부' 기술이 사라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자료집 끝에는 이렇게 강조하고 있었다. 전쟁과 군사기지화를 허용하지 말 것, 헌법 9조를 지킬 것, 그리고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고 이어갈 것. 전쟁 책임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운동을 넓히자는 대목이 마지막이었다. 이날 강연에 자리를 채운 것은 백발의 노인들이었고, 젊은 세대는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이 노인들조차 전쟁을 직접 겪은 사람은 아니다. 어른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로 이 문제를 알고 있는 세대다. 앞서 전시장에서 만난 나카이 씨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는 "정치가 오히려 사람들을 전쟁으로 몰아갔고, 그 피해를 일본인뿐 아니라 주변 이웃 나라까지 준 것"이라며 "이런 일이 더 이상 없어야 하는데 다시 전쟁이 가능한 나라로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젊은 세대가 관심을 가져주면 좋을 텐데, 보다시피 나이 든 사람들밖에 평화를 원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40명 중 다섯 명 남아 지난 7월28일 교토시 기타구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2층 세미나실에서 아다치 교코(足立恭子) 씨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화면은 도쿄에 있는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 전시 공간으로, 벽면을 피해 여성들의 얼굴 사진으로 채웠다. 아다치 씨는 이 자료관에서 열린 강연을 통해 피해자 박영심 씨의 생애를 알게 됐다. (사진=손기호 기자) 일본 정부가 가해 사실을 인정한 문서는 있다. 1993년 고노 담화는 위안소 설치와 관리, 위안부 이송에 옛 일본군이 관여했고 모집 과정에서 본인 의사에 반한 사례가 있었다고 인정했다. 1995년 무라야마 담화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각국에 손해와 고통을 줬다며 반성과 사죄를 표명했다. 그러나 국가의 법적 책임을 인정한 배상은 없었다. 1995년 만들어진 아시아여성기금은 민간 모금 방식이어서 수령을 거부한 피해자가 적지 않았다. 2015년 12월 한·일 합의에는 이 문제가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는 문구가 들어갔으나, 피해 당사자의 의견을 듣지 않고 발표됐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현직 총리가 피해자를 만나 사죄한 적도 없다. 이제 일본 정부가 피해자에게 사죄할 기회는 얼마 남지 않았다. 한국 성평등가족부에 따르면 올해 3월 기준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240명, 이 가운데 235명이 세상을 떠났다. 남은 분은 다섯 명. 평균 연령 95.8세, 최고령은 1928년생으로 만 97세다. 정부에 신고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피해자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1991년 김학순 씨가 위안부 피해 사실을 실명으로 증언한 지 35년이 지났다. 일본 정부는 1965년 청구권협정으로 배상 문제가 끝났다는 입장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당사자가 세상을 떠난다고 해서 가해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남은 분들과 유가족 앞에 직접 서서 사죄하고, 자국 군대가 저지른 일을 교과서에 실어 젊은 세대에게 가르쳐야 한다. 다섯 분이 모두 떠나고 나면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된다. 나카이 씨는 재일교포다. 뿌리가 한국에 있으니 그럴 수 있다고 볼지 모른다. 그러나 그와 마음을 같이하는 일본인들이 있었다. 이들이 46년째 모아 온 것은 일본이 자국민과 이웃 나라에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일본 정부는 다시 전쟁이 가능한 나라로 가고 있지만, 과거를 기억해야 한다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 언론사 원문 보기

댓글 0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