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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와 연결로 시작한 필리핀에서의 새 학년
2026. 08. 23. 오전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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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세부의 작은 IB 학교에서 다시 묻는 교육의 본질
지난 6월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참교육'을 꽤 무거운 마음으로 시청했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교권보호국' 감독관들이 학교에 들어가 선을 넘은 학생과 학부모, 때로는 교사까지 응징한다. 해결 방식은 분명 판타지이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너무나 현실의 교실 이야기이다. 학교폭력, 무분별한 민원, 무너진 교권, 자기 아이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부모, 경쟁에 지친 학생들, 홀로 버티다 한계에 몰리는 교사들. 누군가를 통쾌하게 응징한다고 해서 이 복잡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두 달쯤 지나 환대와 연결로 새 학년을 시작하는 필리핀 세부 작은 학교를 경험하며 '참교육'을 보며 품었던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필리핀에서 IB(International Baccalaureate) 교육을 학부모로 접한 지 3년째다. IB는 질문하고 탐구하며, 다른 관점에 열려 있고, 불확실성 속에서도 도전하고, 자신의 경험을 성찰할 줄 아는 사람 등을 지향하며 이를 열 가지 Learner Profile(학습자상)으로 제시한다. 이런 언어가 내게 완전히 낯설지 않은 것은 한국의 혁신교육이 지향해 온 방향과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방향에는 학생의 주도성을 높이는 수업, 배움과 성장에 초점을 둔 평가,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공동체 문화, 그리고 궁극적으로 학생의 전인적 성장을 돕는 교육 공동체에 대한 지향이 담겨 있다. 물론 IB와 혁신학교는 만들어진 배경도, 제도도, 운영 방식도 다르다. 그러나 아이들을 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배움에 참여하는 '주체'로 보는 것, 그리고 학생과 교사, 부모가 아이의 성장을 '함께' 고민하는 교육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은 놀랄 만큼 비슷하다.
▲ New Family Orientation
▲ Welcome to the CIS Community
▲ CIS PTA Coffee Morning
올해 첫 Coffee Morning. 부모들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새로운 가족들과 관계를 맺는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Cebu International School(세부 인터네셔널 스쿨, CIS)은 필리핀 세부의 작은 IB 국제학교다. 8월 새 학년이 시작되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수업시간표나 교과과정이 아닌 바로 사람들이었다. 새로 학교에 들어온 가족들을 위한 New Family Orientation(뉴 패밀리 오리엔테이션)은 처음 온 부모와 아이들에게 학교를 소개하고, 필요한 사람을 만나게 하며,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첫 연결을 만드는 자리다.
며칠 뒤 PTA Coffee Morning(피티에이 커피 모닝)에서는 부모들이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새로 온 부모에게 말을 걸고, 이름을 묻고, 학년별 학부모 그룹을 연결했다. '참교육' 드라마를 보고 난 뒤라 그랬을까. 특별할 것 없는 학교 행사가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학교는 새 학년이 시작되자마자 사람들을 연결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을 쓰고 있었다. 아이뿐 아니라 부모에게도 '당신은 이제 이 공동체의 한 사람'이라고 알려주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학교는 늘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 달라고 말한다. 걱정되는 일이든 새로운 아이디어든 함께 이야기하고 문제가 생기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더 나은 방향을 찾아가고 싶다고 손을 내민다. 물론 어느 학교든 갈등은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문제가 없는 학교'라는 환상이 아니라, 갈등이 생겼을 때 서로를 교육의 반대편에 세우지 않으려는 태도일 것이다. 부모가 학교의 고객이 되고, 교사는 민원의 대상이 되고, 학교는 방어해야 하는 기관이 되는 순간 '교육공동체'라는 말은 힘을 잃는다. 생각이 달라도 '우리는 한 아이의 성장을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는 전제가 남아 있다면 다시 이야기할 여지가 생긴다.
학생에게 학교의 한 자리를 내어주는 일
방과 후 활동 박람회 ASA(After School Activities, 애프터 스쿨 엑티비티) Fair에서 눈에 들어온 것은 학생들이 직접 이끄는 활동이었다. 어떤 활동에서는 학생이 단순한 참가자가 아니라 직접 기획하고 운영하는 주체가 되어 관심 있는 활동을 소개하고, 참여할 사람을 모집한다.
학교는 아이디어의 '쓸모'를 먼저 평가하기보다, 학생이 고민 끝에 꺼내 놓은 작은 생각도 실제로 시도해 볼 수 있도록 격려한다. 학생 주도형 동아리나 활동 자체는 한국 학교에서도 낯설지 않다. 다만 입시 기록이 중요한 목적이 되는 순간, 질문이 '무엇을 해보고 싶은가'보다 '무엇을 남길 수 있는가'로 기울 때가 있다. 이곳에서는 좋아해서 시작하고, 궁금해서 모이고, 때로는 작고 엉뚱해 보이는 아이디어도 실제 활동이 된다.
BTS(Back to School, 백투 스쿨) 행사에서 부모들이 아이의 시간표를 따라 교실을 돌며 담당 교사를 만난다. 각 교사에게 주어진 시간은 약 8분. 교사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 뿐 아니라 어떤 수업 목표를 가지고 앞으로 1년을 아이들과 보낼 것인지 설명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내게 이 만남이 주는 울림은 꽤 컸다.
아이의 교실에 서서 앞으로 1년을 함께 할 교사가 '나는 아이들과 이런 배움을 만들고 함께 성장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니 직접 가르치는 지식 뿐 아니라 교사의 관계 맺는 방식 자체가 하나의 '잠재적 교육과정'이 되어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신뢰가 생겼다.
교육과정은 문서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같은 교과서와 교육과정을 가지고도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 실패를 어떻게 다루는가, 학생의 생각을 얼마나 기다려 주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교실이 된다. 결국 아이를 어떤 학습자로 바라보는지, 학교가 교사가 자신의 교육을 해낼 수 있도록 얼마나 지지하는지, 부모가 그 과정에서 어떻게 조력하는지가 함께 중요하다.
'Go Home Adam' 세상을 돌아 다시 학교로
#GoHomeAdam에서 다시 만난 우리
그렇게 새 학년이 시작되던 어느 날, 학교에 특별한 손님이 왔다. 불과 1년 전까지 이 학교의 학생이었던 Adam Desvaux였다. 2025년 졸업생인 아담은 인스타그램 '@gohomeadam'에 자신의 여행을 기록해 왔다. 2025년 7월 프랑스에서 자전거 여행을 시작한 그는 유럽과 아시아를 지나 필리핀 세부로 돌아왔다. 세부 현지 언론은 그가 34개국을 거쳐 약 2만8000km를 달렸다고 전했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필리핀인 어머니를 둔 Filipino-French 청년 아담은 이날 강연에서 두 문화적 배경 사이에서 성장하며 '나는 어디에 속하는 사람인가'라는 문제를 고민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인스타그램 이름 'Go Home Adam'이 전과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어디가 자신의 집인가를 고민했던 한 청년이 프랑스에서 출발해 수많은 국경을 건너 자신이 자란 세부로 돌아오는 여행. 그는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만난 사람들의 대부분이 친절했다고 했다. 혼자 수십 개의 국경을 넘어온 사람의 기억에 위험보다 낯선 이들의 친절이 더 많이 남아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혼자 여행하기 때문에 현지인이나 다른 여행자들과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었고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기를 좋아하며, 서로 다른 사람들의 경험에서 조금씩 무언가를 배우면서 자신도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간다고 했다. 강연 내내 백만 불짜리 미소를 머금은 그의 태도 역시 세상을 먼저 경계하기보다 호기심을 갖고 바라보는 쪽에 가까워 보였다. 물론 여행은 낭만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혼자 하루 7시간에서 11시간씩 자전거를 타고, 고장 난 자전거도 직접 고쳐야 했다. 어디로 갈지, 무엇이 안전한지 스스로 판단해야 했다. 그는 큰 모험을 시작하기 전에 완벽하게 준비될 수는 없다고 했다. 일단 시작하고, 그 상황 안에서 배우는 것. 실제로 자신의 첫 주도 형편없었지만 "그렇게 배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담의 이야기를 들으며 학교에서 익숙하게 봐온 IB Learner Profile(아이비 러너 프로필)의 몇 단어가 떠올랐다.
Inquirer(탐구하는 사람), Open-minded(열린 마음을 지닌 사람), Risk-taker(도전하는 사람), Reflective(성찰하는 사람).
물론 아담의 성장을 'IB 교육의 결과'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의 성장에는 부모와 친구, 타고난 기질, 문화적 배경과 개인적인 경험, 수많은 만남이 함께 작용한다. 다만 그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IB가 아이들에게 길러주고 싶다고 말해온 가치들이 그의 삶의 태도와 여러 번 겹쳐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Adam의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 그것을 경청하는 후배들
다시 드라마 '참교육'으로 돌아가 본다. 드라마 속 학교에서는 학생과 교사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교사는 자신을 보호해야 하며, 부모와 학교는 문제를 해결할 동료라기보다 서로를 방어해야 할 상대가 되기도 한다. 교사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는 반드시 필요하고, 학생 역시 폭력과 부당함으로부터 보호 받아야 한다. 그와 함께, 한 걸음 더 앞선 질문도 필요하지 않을까.
학생과 교사, 부모 모두가 자신이 이 교육 공동체에 속해 있으며, 그 안에서 함께 책임을 나누고 있다고 느끼는가? 교사는 문제를 혼자 떠안지 않아도 되는가? 부모는 학교와 함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가? 학생에게는 스스로 선택하고,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해볼 자리가 있는가?
그리고 학교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만들고 세상을 만날 힘을 길러주고 있는가?
이번 새 학년을 시작하며 CIS에서 본 장면들은 거창한 제도가 아니었다. 새 가족을 맞이하고 부모들을 연결하고, 학생에게 활동을 이끌 자리를 내어주고, 교사가 자신이 만들고 싶은 배움을 부모와 나누는 작은 장면들이었다. 사람을 연결하고, 자신이 이곳에 속해 있음을 느끼게 하고, 아이에게 선택할 자리를 주고, 배움을 학교와 가정이 함께 책임지는 것. 그리고 그 사이로 한 졸업생이 자전거를 타고 세상을 돌아 다시 학교로 돌아와 길 위에서 만난 따뜻한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문득 학교의 역할을 생각해 본다. 학교가 아이에게 세상의 모든 위험을 없애줄 수는 없다. 아이의 삶에 닥칠 모든 문제의 정답을 미리 가르쳐줄 수도 없다. 대신 자신의 생각을 갖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질문하고, 실패해도 다시 시작하고, 필요할 때 도움을 청하며, 낯선 세계에서도 다음 길을 선택할 힘을 길러줄 수는 있을 것이다. 좋은 학교는 아이를 영원히 품는 학교가 아니라, 결국 세상으로 내보낼 수 있는 학교여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두 달 전 '참교육'을 보며 품었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간다.
"우리는 어떤 아이를 키우고 싶은가. 그리고 그런 아이를 키워내기 위해 학교는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
IB인가, 혁신학교인가라는 제도의 이름은 그 다음 문제일지도 모른다. 학생과 교사, 부모 모두 안전하게 교육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느끼고, 문제가 생겼을 때 다시 마주 앉을 수 있는 학교를 상상해야 한다. 교육은 결국 아이를 학교 안에 잘 머물게 하는 일이 아니라 언젠가 학교 밖에서도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세상으로 내보내는 일이니까.
지난 6월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참교육'을 꽤 무거운 마음으로 시청했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교권보호국' 감독관들이 학교에 들어가 선을 넘은 학생과 학부모, 때로는 교사까지 응징한다. 해결 방식은 분명 판타지이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너무나 현실의 교실 이야기이다. 학교폭력, 무분별한 민원, 무너진 교권, 자기 아이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부모, 경쟁에 지친 학생들, 홀로 버티다 한계에 몰리는 교사들. 누군가를 통쾌하게 응징한다고 해서 이 복잡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두 달쯤 지나 환대와 연결로 새 학년을 시작하는 필리핀 세부 작은 학교를 경험하며 '참교육'을 보며 품었던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필리핀에서 IB(International Baccalaureate) 교육을 학부모로 접한 지 3년째다. IB는 질문하고 탐구하며, 다른 관점에 열려 있고, 불확실성 속에서도 도전하고, 자신의 경험을 성찰할 줄 아는 사람 등을 지향하며 이를 열 가지 Learner Profile(학습자상)으로 제시한다. 이런 언어가 내게 완전히 낯설지 않은 것은 한국의 혁신교육이 지향해 온 방향과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방향에는 학생의 주도성을 높이는 수업, 배움과 성장에 초점을 둔 평가,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공동체 문화, 그리고 궁극적으로 학생의 전인적 성장을 돕는 교육 공동체에 대한 지향이 담겨 있다. 물론 IB와 혁신학교는 만들어진 배경도, 제도도, 운영 방식도 다르다. 그러나 아이들을 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배움에 참여하는 '주체'로 보는 것, 그리고 학생과 교사, 부모가 아이의 성장을 '함께' 고민하는 교육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은 놀랄 만큼 비슷하다.
▲ New Family Orientation
▲ Welcome to the CIS Community
▲ CIS PTA Coffee Morning
올해 첫 Coffee Morning. 부모들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새로운 가족들과 관계를 맺는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Cebu International School(세부 인터네셔널 스쿨, CIS)은 필리핀 세부의 작은 IB 국제학교다. 8월 새 학년이 시작되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수업시간표나 교과과정이 아닌 바로 사람들이었다. 새로 학교에 들어온 가족들을 위한 New Family Orientation(뉴 패밀리 오리엔테이션)은 처음 온 부모와 아이들에게 학교를 소개하고, 필요한 사람을 만나게 하며,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첫 연결을 만드는 자리다.
며칠 뒤 PTA Coffee Morning(피티에이 커피 모닝)에서는 부모들이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새로 온 부모에게 말을 걸고, 이름을 묻고, 학년별 학부모 그룹을 연결했다. '참교육' 드라마를 보고 난 뒤라 그랬을까. 특별할 것 없는 학교 행사가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학교는 새 학년이 시작되자마자 사람들을 연결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을 쓰고 있었다. 아이뿐 아니라 부모에게도 '당신은 이제 이 공동체의 한 사람'이라고 알려주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학교는 늘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 달라고 말한다. 걱정되는 일이든 새로운 아이디어든 함께 이야기하고 문제가 생기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더 나은 방향을 찾아가고 싶다고 손을 내민다. 물론 어느 학교든 갈등은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문제가 없는 학교'라는 환상이 아니라, 갈등이 생겼을 때 서로를 교육의 반대편에 세우지 않으려는 태도일 것이다. 부모가 학교의 고객이 되고, 교사는 민원의 대상이 되고, 학교는 방어해야 하는 기관이 되는 순간 '교육공동체'라는 말은 힘을 잃는다. 생각이 달라도 '우리는 한 아이의 성장을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는 전제가 남아 있다면 다시 이야기할 여지가 생긴다.
학생에게 학교의 한 자리를 내어주는 일
방과 후 활동 박람회 ASA(After School Activities, 애프터 스쿨 엑티비티) Fair에서 눈에 들어온 것은 학생들이 직접 이끄는 활동이었다. 어떤 활동에서는 학생이 단순한 참가자가 아니라 직접 기획하고 운영하는 주체가 되어 관심 있는 활동을 소개하고, 참여할 사람을 모집한다.
학교는 아이디어의 '쓸모'를 먼저 평가하기보다, 학생이 고민 끝에 꺼내 놓은 작은 생각도 실제로 시도해 볼 수 있도록 격려한다. 학생 주도형 동아리나 활동 자체는 한국 학교에서도 낯설지 않다. 다만 입시 기록이 중요한 목적이 되는 순간, 질문이 '무엇을 해보고 싶은가'보다 '무엇을 남길 수 있는가'로 기울 때가 있다. 이곳에서는 좋아해서 시작하고, 궁금해서 모이고, 때로는 작고 엉뚱해 보이는 아이디어도 실제 활동이 된다.
BTS(Back to School, 백투 스쿨) 행사에서 부모들이 아이의 시간표를 따라 교실을 돌며 담당 교사를 만난다. 각 교사에게 주어진 시간은 약 8분. 교사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 뿐 아니라 어떤 수업 목표를 가지고 앞으로 1년을 아이들과 보낼 것인지 설명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내게 이 만남이 주는 울림은 꽤 컸다.
아이의 교실에 서서 앞으로 1년을 함께 할 교사가 '나는 아이들과 이런 배움을 만들고 함께 성장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니 직접 가르치는 지식 뿐 아니라 교사의 관계 맺는 방식 자체가 하나의 '잠재적 교육과정'이 되어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신뢰가 생겼다.
교육과정은 문서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같은 교과서와 교육과정을 가지고도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 실패를 어떻게 다루는가, 학생의 생각을 얼마나 기다려 주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교실이 된다. 결국 아이를 어떤 학습자로 바라보는지, 학교가 교사가 자신의 교육을 해낼 수 있도록 얼마나 지지하는지, 부모가 그 과정에서 어떻게 조력하는지가 함께 중요하다.
'Go Home Adam' 세상을 돌아 다시 학교로
#GoHomeAdam에서 다시 만난 우리
그렇게 새 학년이 시작되던 어느 날, 학교에 특별한 손님이 왔다. 불과 1년 전까지 이 학교의 학생이었던 Adam Desvaux였다. 2025년 졸업생인 아담은 인스타그램 '@gohomeadam'에 자신의 여행을 기록해 왔다. 2025년 7월 프랑스에서 자전거 여행을 시작한 그는 유럽과 아시아를 지나 필리핀 세부로 돌아왔다. 세부 현지 언론은 그가 34개국을 거쳐 약 2만8000km를 달렸다고 전했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필리핀인 어머니를 둔 Filipino-French 청년 아담은 이날 강연에서 두 문화적 배경 사이에서 성장하며 '나는 어디에 속하는 사람인가'라는 문제를 고민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인스타그램 이름 'Go Home Adam'이 전과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어디가 자신의 집인가를 고민했던 한 청년이 프랑스에서 출발해 수많은 국경을 건너 자신이 자란 세부로 돌아오는 여행. 그는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만난 사람들의 대부분이 친절했다고 했다. 혼자 수십 개의 국경을 넘어온 사람의 기억에 위험보다 낯선 이들의 친절이 더 많이 남아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혼자 여행하기 때문에 현지인이나 다른 여행자들과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었고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기를 좋아하며, 서로 다른 사람들의 경험에서 조금씩 무언가를 배우면서 자신도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간다고 했다. 강연 내내 백만 불짜리 미소를 머금은 그의 태도 역시 세상을 먼저 경계하기보다 호기심을 갖고 바라보는 쪽에 가까워 보였다. 물론 여행은 낭만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혼자 하루 7시간에서 11시간씩 자전거를 타고, 고장 난 자전거도 직접 고쳐야 했다. 어디로 갈지, 무엇이 안전한지 스스로 판단해야 했다. 그는 큰 모험을 시작하기 전에 완벽하게 준비될 수는 없다고 했다. 일단 시작하고, 그 상황 안에서 배우는 것. 실제로 자신의 첫 주도 형편없었지만 "그렇게 배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담의 이야기를 들으며 학교에서 익숙하게 봐온 IB Learner Profile(아이비 러너 프로필)의 몇 단어가 떠올랐다.
Inquirer(탐구하는 사람), Open-minded(열린 마음을 지닌 사람), Risk-taker(도전하는 사람), Reflective(성찰하는 사람).
물론 아담의 성장을 'IB 교육의 결과'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의 성장에는 부모와 친구, 타고난 기질, 문화적 배경과 개인적인 경험, 수많은 만남이 함께 작용한다. 다만 그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IB가 아이들에게 길러주고 싶다고 말해온 가치들이 그의 삶의 태도와 여러 번 겹쳐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Adam의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 그것을 경청하는 후배들
다시 드라마 '참교육'으로 돌아가 본다. 드라마 속 학교에서는 학생과 교사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교사는 자신을 보호해야 하며, 부모와 학교는 문제를 해결할 동료라기보다 서로를 방어해야 할 상대가 되기도 한다. 교사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는 반드시 필요하고, 학생 역시 폭력과 부당함으로부터 보호 받아야 한다. 그와 함께, 한 걸음 더 앞선 질문도 필요하지 않을까.
학생과 교사, 부모 모두가 자신이 이 교육 공동체에 속해 있으며, 그 안에서 함께 책임을 나누고 있다고 느끼는가? 교사는 문제를 혼자 떠안지 않아도 되는가? 부모는 학교와 함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가? 학생에게는 스스로 선택하고,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해볼 자리가 있는가?
그리고 학교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만들고 세상을 만날 힘을 길러주고 있는가?
이번 새 학년을 시작하며 CIS에서 본 장면들은 거창한 제도가 아니었다. 새 가족을 맞이하고 부모들을 연결하고, 학생에게 활동을 이끌 자리를 내어주고, 교사가 자신이 만들고 싶은 배움을 부모와 나누는 작은 장면들이었다. 사람을 연결하고, 자신이 이곳에 속해 있음을 느끼게 하고, 아이에게 선택할 자리를 주고, 배움을 학교와 가정이 함께 책임지는 것. 그리고 그 사이로 한 졸업생이 자전거를 타고 세상을 돌아 다시 학교로 돌아와 길 위에서 만난 따뜻한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문득 학교의 역할을 생각해 본다. 학교가 아이에게 세상의 모든 위험을 없애줄 수는 없다. 아이의 삶에 닥칠 모든 문제의 정답을 미리 가르쳐줄 수도 없다. 대신 자신의 생각을 갖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질문하고, 실패해도 다시 시작하고, 필요할 때 도움을 청하며, 낯선 세계에서도 다음 길을 선택할 힘을 길러줄 수는 있을 것이다. 좋은 학교는 아이를 영원히 품는 학교가 아니라, 결국 세상으로 내보낼 수 있는 학교여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두 달 전 '참교육'을 보며 품었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간다.
"우리는 어떤 아이를 키우고 싶은가. 그리고 그런 아이를 키워내기 위해 학교는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
IB인가, 혁신학교인가라는 제도의 이름은 그 다음 문제일지도 모른다. 학생과 교사, 부모 모두 안전하게 교육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느끼고, 문제가 생겼을 때 다시 마주 앉을 수 있는 학교를 상상해야 한다. 교육은 결국 아이를 학교 안에 잘 머물게 하는 일이 아니라 언젠가 학교 밖에서도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세상으로 내보내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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